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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한계선에서 500년 꽃 피운 나무 성자들

(22)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숲

  • 입력 2015.05.13 00:00
  • 수정 2015.06.04 18:07
  • 기자명 김윤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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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피었다는 소식에는 뚝뚝 지는 붉은 낙화가 함께 들린다. 진달래, 개나리, 철쭉, 벚꽃 피었다는 소식은 얼마나 화사한가. 유달리 동백꽃 피었다는 전갈에는 핏물 같은 봄날 뚝뚝 듣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꽃 피었다는 말이 꽃 지는 소리로 동시통역되는 이 봄, 환청이 환청만은 아니다.꽃소식 들은 지 두어 달도 더 지나 나서는 길은 꽃맞이가 아니다. 숱한 꽃편지의 발원지 남쪽이 아니라 서쪽 끝으로 떠나는 길은 더욱 꽃맞이가 아니다.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의 생육 북방한계선이다. 이곳에 천연기념물 제169호 마량리 동백나무숲이 있다.
 

‘하필 그곳에서’…꽃맞이 아닌 꽃배웅

하필이면 생존의 극지, 거기다 몰아치는 바닷바람 막아줄 바람벽 하나 없는 바닷가 야산절벽에 500년 숲을 이룬동백들. 그 동백꽃을 보러 가는 길은 꽃맞이가 아니라 꽃배웅이다. 더 이상 북쪽으로는 볼 수 없어 꽃배웅이다. 꽃놀이는커녕 성지순례다. 여기만큼은 국도를 따라 돌아 돌아서 가고 싶지만 쫓기는 시간은 어쩔 수 없어 내비게이션 최단거리를 택해 몇 개의 고속도로를 이어 달린다.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 송찬호, 「동백이 활짝」 전문, 『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 2000)

송찬호의 세 번째 시집 『붉은 눈, 동백』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동백꽃’ 하면 불현듯 그를 떠올린다. 그는 동백꽃 속에 ‘웅크린’ 사자를 찾아낸 최초의 시인일 것이다. 사자가 솟구쳐 올린 꽃, 사자의 네 발이자 갈기인 그 꽃은 아마도 시인이 문장을완성하기 전에 바람에 베어 먹힐 것이다. ‘식물성을 뒤엎어 단박에 뛰어넘은 동물성의 상상력’이라는 찬사를 들은시인에게도 식물보다 약한 꽃, 바람보다 약한 꽃, 그것이 사자다. 단호하고 결기에 차고 모든 것을 걸고 솟구치는그는 지구상에서 멸종해가는 사자의 일종이다. 그의 시집에는 시인이 문장을 완성할 틈새도 없이 한없이 동백이졌다. 바람에 베어 먹힌 꽃들이 자욱이 땅에 내렸다.
 

자기 스스로에게만 매질하는 시대

사자인 동백꽃을 베어 먹는 바람의 비유는 뛰어난 함축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 )은 저서 『액체근대』에서 근대를 ‘고체근대’와 ‘액체근대’로 나눴다. 영문학자이자 문화이론가인 박미선이 이 책을 서평한 대로, 고체성과 무거움 따위를 특징으로 하는 고체근대는 포드자동차 시스템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 거대한자본과 노동이 공장이라는 육중한 물질적 공간에서 서로 감시하며 결속하는 원형감옥구조(panopticon)다. 고체근대는 견고한 구조다.그러나 이후의 액체근대는 ‘견고한 모든 것을 녹이는’ 과정이었다.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근대는 대략 1980년대서구에서 발흥하기 시작한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와 궤적을 같이 한다. 탈규제화, 자유화, 유동화는 체제로부터자유로워진 행위주체를 개인으로 축소시킨다.액체근대는 ‘자유’를 증가시킨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자유가 전통적인 집단적 행위주체의 형성으로 연결되지못한 채 오히려 개인들이 자신의 결정에 온전한 책임을 떠맡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심초사’는 모든 개인이 강박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책무가 된다.사회문제와 체제모순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회문제의 개별화 과정과 더불어 개인들은 진정한 시민이 되지 못하게 된다. 개인은 이제 공통의 공적 이해관심사를 나누지 못하며 개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특정 고충들 역시 공동의 대의명분으로 응결되지 못하고, 사회는 자율적이기를 그친다. 대신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매질하는 것으로 바뀌었다.’‘자기 자신에 대한 매질’의 실제 사례는 ‘스펙 쌓기’, ‘희망 고문’, ‘현실 무한긍정의 복음’, ‘일 중독’ 등 수없이 많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더욱 열심히 일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컴컴하다. 지금의 시스템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어쩜 그리도 똑같은’ 축제의 풍경

길이 멀수록 여행에 대한 기대는 조금씩 커진다. 3시간 가까이 달려 닿은 마량리와 마량포구. 지도에서 보면 태안반도와 군산 간척지 사이, 또렷한 눈매로 내민 삼족오의 머리 형세다. 마침 ‘동백꽃·쭈꾸미 축제’ 마지막 날 금요일. 이름부터 동백꽃과 쭈꾸미의 ‘난해한’조합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바닷바람과 갯벌 냄새 물씬 풍긴다.가끔 소형버스로 단체 손님이 도착하기도 하지만 관람객보다 노점상과 행상이 더 많다.주차장 옆 행사장 입구 양쪽과 행사장을 빙 둘러 노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앞을 지나왼쪽으로 꺾은 해변길에도 노점이 줄지어 들어섰다. 이 길을 조금 더 걸어가면 동백나무숲 매표소다.
행사장 무대 위. 진행자와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각설이 복장을 했다. 아직 썰렁한분위기를 띄워 보려고 기를 쓴다. ‘오버 액션’으로 재담을 하다가 성대모사도 한다. 앞을지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붙잡고 늘어지기도 한다. 대뜸 애꿎은 욕바가지도 쏟아냈다. 다 별무소용. 결국 노래방에 춤판이 벌어졌다. 어쩔 수 없다. 이게 좋다는데…. 어딜 가나 전국 대부분 축제의 파장 풍경. 이 익숙한 풍경의 유구한 역사.그것은 틀림없이 40~50년 전에도 전국적으로 마을마다 인기였던 콩쿨대회였다. 카바이드 불 켜진 무대에 올라 노래 한 곡을 뽑는 날은 ‘카수’가 되는 날이었다. 상으로 냄비며찜통도 타고 시계도 탔다. 무엇보다 ‘기분 째졌다’. 마이크를 잡는다는 것이 주는 흥분과기쁨은 기묘했다. 왕조의 가렴주구와 식민지, 전쟁, 그리고 오랜 권위주의 정권 아래 살면서 내면화한 억눌림과 자기 은폐, 자기 검열의 습관을 마이크는 쉬 무너뜨렸다. 노래방은 콩쿨대회의 최신 버전이다. 마이크를 잡는 기쁨은 아직도 우리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근원은 아닐까.
 

축제의 소음, 발전소의 소음

전국의 수많은 축제들의 옥석이 가려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동백꽃·쭈꾸미축제는오랜 생명력을 지닌 축제로 이어지길 바란다. 다만 대형 스피커의 음량은 좀 줄였으면 좋겠다. 동백정에까지 왕왕대는 노래방 시스템은 거북하고 민망하다. 내로라하는 어느 맛집 쭈꾸미철판요리는 느끼하고 너무 덜큰하다. “어쩌자고 저 사람들/ 산경(山經) 가자 할까요/ 길에서 주워/ 돌탑에 올린 돌 하나/ 그게 목 부러진 동백이었는데” (송찬호, 『동백』일부, 위의 시집)동백나무숲 입구를 들어선다. 좁지 않은 진입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 시설용량 40만kW의 서천화력발전소가 거대한 성벽처럼 막아서 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의외의 풍경이다. 마음에 그리고 왔던 풍광 하나가 쉽게 지워진다. 무연탄을 땐다는 발전소의 높다란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솟아오른다.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뜻의 무연탄이라는 이름은 ‘저연탄’이나 ‘중연탄’으로 바꿔야 한다.터빈 돌아가는 소리일까. 진입로는 왼쪽 발전소에서 들리는 기계음으로 윙윙거린다. 서천발전소 측은 정원처럼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이 동백나무숲과, 무연탄을 실어 나르는 철도를 내세우며 아름다운 발전소라고 자랑한다. 발전소 입장에서는 그럴 테지만, 숲이나숲을 찾는 여행객의 처지에서는 그 반대가 아닐까. 진입로가 전망 좋은 해안 쪽이 아니라
시야 막힌 반대편 발전소 사이로 난 이유도 요령부득이다. 어쩐지 진입로가 발전소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싶을 때, 오른쪽 동백나무숲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반갑다.
 

변두리 달동네에 뿌리를 박고

마량리 동백나무숲 입구는 평범해서 쓸쓸하다. 특별히 대우받을 일도, 가꿀 일도 없는 이웃집 같은 계단을 오른다. 생육의 북방 한계선은 생존의 조건 최악인 곳이다. 나무는 변두리 끝동네나 달동네인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그 세월이 500년. 나무는 숲을 이뤘다. 모진 세월을 꿋꿋이 이겨낸 숲은 견자(堅者)다. 고요한 성자(聖者)의 모습.동백나무는 수령 500년쯤이면 키가 보통 7m쯤 자란다고 한다. 마량리 동백나무의 키는2~3m.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 세월의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면, 500년 유서 깊은 숲은 성기고 볼품없는 공원 비탈에 불과하다.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했지만 당당한 어른으로 장성한 아이의 부모라도 된 듯, 짠하고 대견하다.동백꽃 축제 마지막 날이지만 꽃은 한참이나 덜 피었다. 꽃이나 단풍과 관련한 축제를벌이는 전국 지자체 담당 공무원의 가장 큰 고민이 날짜 잡는 일이라는 거, 웬만하면 다안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장기 기상예보 등을 아무리 참고해도, 꽃과 단풍이 절정일 때를 딱 맞추기는 ‘여자의 마음’ 맞추는 일만큼 어렵다고 농담도 한다.올해는 초봄부터 기온이 20도까지 오르는 날들과 꽃샘추위가 종잡을수 없이 끼어들었다. 날씨가 이러자 식물의 생태시계도 혼란에 빠진 듯올봄 꽃차례는 무너졌다. 산수유, 개나리, 벚꽃, 목련, 진달래, 철쭉들이거의 전국 동시다발로 피었다. 여기로 오는 길에도 그랬다.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혼란은 코앞의 상황이다. 사람들은 익숙해져 당연하다는 듯이런 혼란에 무감각하다. 꽃축제 날짜 잡기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설사 동백꽃이 절정이었다 해도, 이곳의 동백은 남녘처럼 화려하지 않다. 나무는 관목의 습성을 익힌 듯 아래로 퍼져 나지막하고 줄기는 가늘다. 꽃송이는 적고 작다. 그럼에도 색상은 강렬하다. 생존의 한계상황에서 온몸으로 스스로를 최적화한 꽃의 안간힘이 가지 끝에 낮등을 밝힌다. 이곳 동백꽃이 더욱 붉은 이유다.“동백은 결코 땅에/ 항복하지 않는 꽃이란다/ 거친 땅을 밟고 다니느라/ 동백의 발바닥은 아주 붉지/ 그런 부리부리한 동백이/ 앞발을 번쩍들고/ 이만큼 높이에서 피어 있단다/ 동물원 쇠창살을 찢고/ 집을 찢고/아버지를 찢고/ 나뭇가지를 찢고 나와 이렇게 /불끈,” (송찬호, 『山經(산경) 가는 길』 부분, 위의 시집)
 

“결코 땅에 항복하지 않는 꽃”

동백나무숲 위에는 동백정이 서있다. 철썩이는 파도와 해풍 사이로 손에 닿을 듯 오롯이 오력도가 떠있다. 바라볼수록 깊어지는 서해 풍경 속으로 안개는 수평선을 묽게 지운다. 동백숲에서 노니는 동박새는 좀처럼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새소리와 바닷바람이 대구(對句)처럼 맞아떨어진다. 이 기막힌 풍광을 같이 나누자는 듯 발전소 소음은 쉴 새없이 참견하며 풍광을 깬다.동백꽃은 필 때보다 질 때 더욱 붉은 꽃이다. 흔히 말하듯, 동백꽃은 두번 핀다. 가지에서 한 번 피고, 떨어져 땅에서 다시 핀다. 땅 위에 떨어진 꽃들의 선연한 이별이 마음을 물들인다. 꽃들은 그렇게 해마다 졌고해마다 다시 피었다. 이 땅 누대의 왕조는 운을 다했어도, 민초와 백성의 삶은 다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오징어 만하다는 물 좋은 서천 쭈꾸미가 당긴다면 서천시장을 들를 일이다.

기어이 기어이 동백이 지고 있네
싸리비를 들고
연신 마당에 나서지만
떨어져 누운 붉은빛이 이미
수백 근 넘어 보이네

벗이여, 이 볕 좋은 날
약술도 마다하고
저리 붉은 입술도 치워버리고
어디서 글을 읽고 있는가
이른 아침부터
한 동이씩 꽃을 퍼다 버리는
이 빗자루 경전 좀 읽어보게

글 김윤곤 기자 seoum@hanmail.net / 사진 김종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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