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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서 ‘나 한국 사람 다 됐구나’ 새삼 느꼈죠”

6월 독도에서 ‘독도 연가’ 열창, 가슴이 뭉클 2002년 북한 이탈 이후 가장 설렛던 무대 더 많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유일한 꿈

  • 입력 2021.12.01 00:00
  • 수정 2021.12.13 14:58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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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원에서 나와서 형사 한 분과 함께 포항에 내려왔는데, 오자마자 휴대폰 하나를 사주더 라고요. 자신과 통화하려면 휴대폰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휴대폰을 손에 쥐면서 그런 생각을 했죠.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 됐구나!’ 중국에서 3년 남짓 생활하면서 휴대폰이 너무 너무 갖 고 싶었거든요.”

  2002년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김수연(51)씨는 지난 9월 가수 자격으로 독도를 방문해 합창단과 함께 공연했다. 합창단은 ‘홀로 아리랑’, ‘내 나라 내 겨레’ 등의 합창곡을 불렀 고, 김씨는 자신의 곡인 ‘독도 연가’를 열창했다. 김씨는 “독도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인지 공연 전날 밤잠을 설쳤을 정도로 설렜다”면서 “20여년 전 담당 형사에게 휴대폰을 건네받으면서 느 꼈던 ‘나 인제 한국 사람 됐구나’하는 감격이 새삼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예술소조’라고 해서 예능인으로 활동하면서 학업을 등한시했어요. 독도 를 잘 몰랐죠. 대한민국에 와서 독도를 알게 되었는데, 그 소중한 독도를 위해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니 그 자긍심이 이루 말할 수 없네요.”

중국인 “당신은 중국에 있기 아깝다. 한국 가라”
  김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다. 두만강과 접해 있어서 보따리 상인 등을 통해 바깥 소식이 많이 흘러드는 편이었다. 바깥 세계를 직접 경험한 계기가 있 었다. 다니던 회사가 중국 용정시에 소재한 기업과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직원 교류 행사 참여차 중국을 가볼 수 있었다.  
  “회령에서는 수시로 전기가 끊겼는데 용정시에 가보니 밤에도 ‘불바다’더군 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그때도 북한을 이탈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라 배급이 끊긴 후 3달만 일하다 오겠다는 생각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공장 직원으로 중국에 갔 을 때 노래방에서 중국인 공장장이 “중국에 와서 노래하면 하루에 50원은 벌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서 돈을 벌겠다는 생 각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인 일자리 브로커에게 “노래하고 싶다”고 했더니 껄껄 웃으면서 “일단 중국어부터 배워라. 중국말도 못 하면서 그런데 가면 위험 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며칠 뒤 파출부 일을 제안받았다. 일종의 가정교사였다. 집주인이 아이들에 게 한국어를 가르쳐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거였다. 3년 동안 그집 딸에게 한국 어를 가르쳤지만 아이는 결국 한 마디도 배우지 못했다. ‘조선 사람’을 깔본 까 닭이었다. 반대로 김씨가 중국어를 마스터했다. 그 집을 나올 때 아이 엄마가 “ 중국에 있기 아깝다. 한국으로 가라”고 조언했다. 집을 비운 사이 북에 있던 남 편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결심을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아코디언과 기타연주, 노래까지... 팔방미인 최고의 인기 가수
  2002년 무렵 영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왔다. 1년 후에 동생과 아버지, 마지막 으로 딸이 남한행에 성공했다. 4년 반 만에 본 딸은 깡말라 있었고 오랜 만에 본 엄마를 무척 어색해했다. 그래도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포항에 정착 한 이후 북한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은 후 이혼하는 일을 겪었지만 딸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두 ‘견딜만 한 일’이 되었다.
  “딸을 못 데려왔다면 세상 아무리 행복한 일에도 저는 불행한 여자일 것입니 다. 반대로 딸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바닥에 떨어졌단 생각은 안 들 었어요.”

  마이크를 다시 잡으면서 진짜 행복을 맛보고 있다. 2003년 지역 방송국이 주최한 노래자랑에서 대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전국노래자랑에서 우수상 을 받았다. 
  2012년부터 해오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갑습니다’를 북한식으로 불러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북한식 창 법을 모두 버렸다. 아코디언과 기타 연주까지 가능해서 어느 행사장에서든 최 고의 인기를 자랑한다. 

  그 사이 특별한 경험도 있었다. 어쩌다 걸출한 제자를 거두었다.
  “2019년에 포항해변전국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여고생을 가르쳤어요. 속성 으로 꼭 두 달 동안 롱턴과 바이브레이션 등 기초를 쌓게 만들었죠. 지금은 전국 구 인기 가수가 됐어요. 더 잘 되어서 국민가수로 우뚝 서길 응원하겠습니다!”  김씨는 “딸과 함께 힘든 고비 다 넘기고 마음껏 노래하는 지금이 너무 좋다” 면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는 우리 딸이 큰 미용실 원장님으로 자리 잡고, 저도 가수로서 더 많은 무대에 서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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