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한국일보 :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사회사회일반
‘흥보가’에 울고 웃던 대구 상인‘글로벌 삼성’ 정신적 초석 놓았다
김채은 기자  ice15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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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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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걸러 장이 서고 큰 장과 작은 장이 번갈아 열린다. (중략) 시장 안은 들끓고 있었다. 여러 갈래의 두꺼운 천으로 천막이 쳐져있고, 그 밑에 등을 맞댄 가게들이 늘어선다. 하루걸러 서는 장은 도시 생활의 리듬이 되어 있었다. 대구의 장은 이곳의 몇 배나 된다고 들었다. 시장은 즐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와 경주 일대를 살았던 모리사키 가즈에가 그녀의 저서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묘사한 1930년대의 경주 시장의 모습이다. 묘사된 글에서 느껴지듯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책의 저자는 1927년 일제강점기에 대구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17년 동안 대구와 경주에서 살다가 1944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한국과 관련된 책을 많이 출간했다.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도 그중 하나다.
근대의 대구와 경주, 김천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이 잘 그려져 있다. 또 책에는 ‘경주에는 양반들 수가 적지 않았지만, 대구와 같은 큰 상인 집안은 본 적이 없었다’고 적혀 있다. 대구에서는 큰 상인 집안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대구와 관련해 가장 눈에 띄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 689년 신문왕은 신라의 발전을 위해 수도를 대구로 이전하고 싶어했다. 비록 반대에 부딪혀 천도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대구는 수도 이전 후보지가 될 만한 이점을 가진 도시였던 것이다. 지리적으로 낙동강 중류와 금호강 합류 지점에 위치해 있어 경상도 물산이 집결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에 따라 상업이 발달하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시장이 크게 발달하게 됐다. 대구의 장은 조선시대 3대 향시로 불릴 만큼 크게 번성해 있었다. 특히 효종 임금에 의해 전국에 3개 설치된 약령시는 대구가 가장 번성했다.
시장의 발달은 산업의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구의 교통망이 발달했다. 1905년의 경부선 개통, 1907년의 부산역과 부산항을 잇는 궤도 부설로 철도수송과 해상수송이 접속되면서 대구 상권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상설 점포 수도 크게 늘었다.

상인들이 북적되는 도시
대구 지역에 내면화된 상인 정신을 은연중에 드러낸 인물이 있다. 바로 국창 박녹주(1905~1979)다. 그는 14살에 대구에 와서 춤과 노래를 배웠다. 그는 판소리 중 경제적 뉘앙스가 강한 ‘흥보가’를 가장 잘했다. 박녹주가 대구에 온 것은 1920년 어름이다. 장이 서면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도시의 풍경을 보면서 그에게 가장 실감나게 다가온 현실은 바로 ‘상업’이 아니었을까. ‘흥보가’ 곳곳에 숨어 있는 다양한 경제적 에피소드들이 아마도 그에게 친밀하고 실감나게 다가왔을 것이다.
대구가 상업이 잘 발달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보부상의 역할도 컸다. 보부상은 먼 지역과 대구가 교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말 대구 인구 7만5,000명 중 60%가 서민층이었다. 서민층 중 보부상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상인이 북적대는 도시였다.
보부상은 상업활동 외에도 지역의 정보를 이어주는 소통창구의 역할도 했다. 또 조직을 구성해서 의협활동도 행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인 서상돈도 보부상 출신이다. 대구시민들이 시장을 중심으로 움직인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금모으기운동 모두 시장과 그 안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던 상인들의 정신에서 비롯된 시민운동이다. 약령시장 상인들은 장사로 모은 돈을 독립자금에 보태기도 했다. 1919년에 전국에서 벌어진 3.1운동도 대구는 대구장에서 발원했다. 대구는 장날인 8일에 맞춰 3월 8일에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다수의 서문외시장(큰장) 상인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제1차 봉기였다. 시위대는 서문시장을 출발, 대구경찰서 앞~종로거리~중앙파출소~달성군청 앞 삼각지로 진출했다.
1922년 대구장은 일제에 의해 현재 서문시장 자리로 이전됐다. 만세운동이 벌어진 서문시장을 정치·경제의 중심이었던 대구부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시키려는 의도였다. 이전한 서문시장은 호수를 매립해서 만든 자리라서 장사를 하기 좋은 환경도 아니었다. 당시의 총독부관인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서문시장 근처의 땅은 늪을 매립하고 공사를 시행한 것이며, 본래는 자연적인 경사지로서, 장마철의 배수로였던 관계로 장내의 대배수로(달서천, 필자)는 60~90도 꾸부러졌으며, 그 서북쪽의 신작로는 배수를 차단하기 일쑤다. 때마침 7월 장마를 당하여 시장일대는 진흙투성이가 되어있고, 부근 일대의 수백 채 인가로 침수되어 온돌방이 무너지고 살림살이가 유실되는 등 일대 참사가 벌어져서 대구당국에서는 이재민 구제사업을 서둘렀다.’
-조선총독부, 조선의 시장, 1923, 572~573면-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니 상권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솟아났다. 1923년의 총 거래액 14,500엔에서 1928년에는 2,595,768엔으로서 5년 사이에 실로 179배가 증가했다.
서문시장 상인들뿐만 아니라 약령시의 약재 상인들도 일제에 의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이 시작되고 일제의 거래 제약 조치에 의해 수난을 겪었다. 어려운 시기를 꿋꿋이 인내하고 약재시장의 전통을 지켜낸 결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약령시’와 ‘한방특구’의 타이틀을 얻어내기도 했다. 상인들은 혼돈의 상황에서 낙담하고 포기하기보다 개개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대구에서 섬유산업이 발전하면서 서문시장은 전국 최대 섬유도매시장으로 성장했다. 전체 점포 중 약 40%가 섬유와 관련 업종이었다. 한때는 전국 섬유 거래량의 70%를 차지하기도 했다. 대구가 섬유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갖는 데 일조했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대구가 섬유의 도시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수출에서 섬유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낮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구는 국내 섬유산업의 메카다. 대구 곳곳에서 섬유산업이 발전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구에는 양말골목, 타월골목, 미싱골목, 섬유회관이 존재하고 있다. 서문시장에서 약 400여개의 점포가 섬유 및 의류 관련 점포다.


삼성상회와 서문시장
1936년 대구 북구 칠성동과 침산동, 비산동 지역은 공업지구로 지정됐다. 침산동 일대는 대구 공업의 중심지로 성장해나갔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글로벌 기업 삼성이 시작된 곳도 대구다. 1938년 이병철 회장이 세운 삼성상회는 삼성의 전신이다. 삼성상회도 상인 정신을 갖고 시작된 곳이다. 국수가게로 시작해 청과물, 건어물 등을 팔았다. 이후 일본, 중국과 무역도 해 큰돈을 벌어 세계 무대에 한발을 내디뎠다. 1954년 섬유산업이 한창일 때는 대구에 제일모직 공장을 세웠다. 현재는 다른 곳으로 이전됐지만, 삼성이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자 유산물이 대구 북구 침산동에 위치한 삼성창조캠퍼스에 남아있다. 삼성상회를 복원해 놓은 건물이 그것이다.
삼성은 옛 자취만 남기고 대구를 떠났지만 그럼에도 태생지를 잊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을 보면 저항의 도시 대구의 마인드가 그대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이건희 회장이 서거하면서 삼성 전직 CEO들은 입을 모아 “이 회장은 돈벌이에 무심했다. 머릿속에 ‘극일’과 ‘초일류’뿐이었다”고 말했다. 부친인 이병철은 일본의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에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라는 말을 했다. 삼성상회의 직원들은 국채보상운동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삼성과 삼성의 직원들에게 극일에 대한 의지는 보다 각별했을 것이다. 요컨대 삼성의 시대 정신과 상업 정신은 후대까지 면면이 이어졌다.
삼성의 근거지는 더 이상 대구가 아니지만 대구민의 상도덕과 상인 정신은 아직도 삼성의 든든한 토대이자 뿌리일 것이다. 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강해지는 대구의 상인 정신이 앞으로도 대한민국 산업의 동력으로 강렬하게 작동하기를 기대해본다.

함께한 책> 모리사키 가즈에,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글항이리, 1984년
대구광역시교육청, <내 고장 대구·경북 다시보기>, 소동, 2012년
정충권, <흥보전·흥보가·옹고집전>, 문학동네, 2010
김광원, <가요 따라 가요>, 유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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