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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교수 무릎 꿇게 한‘올림머리 고수’ 한국 학생

임호순 미용 명장

  • 입력 2021.05.09 00:00
  • 수정 2021.05.10 13:49
  • 기자명 김채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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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고수를 몰라뵀습니다.”
일본인 교수가 한국인 학생에게 무릎을 꿇었다. 해방 후 채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았을 무렵인 1972년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인 ‘학생’은 모두 10명이었고,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프로 미용사가 교수직을 맡아 선진기술을 지도하는 수업이었다. 교수가 올림머리 시범을 보이고 학생들이 따라해 보는 순서였다. 한 학생의 올림머리 ‘작품’ 앞에서 무릎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파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컷을 끝나고 나자 갑자기 선생님이 사라졌다. 잠시 후에 나타난 선생님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이건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야 된다”고 중얼거리면서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이 전설적인 ‘학생’의 이름은 임호순(79), 대한민국 4호 명장이자 미용계의 레전드로 통하는 인물이다.
“우리 집안을 어떻게 보고 미용사를 중매해!”
임 명장의 미용 경력은 반세기에 가깝다. 대구시 기능대회 미용부분 심사장을 비롯한 각종 미용 대회의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대학 강단에서 강의도 했다. 법무부와 보사부 장관 표창도 7회 수상했다.
그는 60년대에 미용사 면허증을 땄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안 되는 일이지만, 기술 자격 시험을 응시하기 위해선 ‘혁명공약’을 외어야 했다. 혁명공약을 적어놓은 종이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외웠다. 낯선 용어를 완벽히 외우는 것이 어려웠지만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가지고 다니며 외워 시험장에 들어갔다. 합격을 하면 합격자 명단이 지역신문에 실렸다. 그만큼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시험보다 어려웠던 건 집안의 반대였다. 당시만 해도 미용사는 두 가지 시선이 동시에 존재하는 직업이었다. 국가에서는 기술자라며 인정해주었지만, 일반에서는 미용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소위 ‘쟁이’라는 거였다. 임 명장의 시고모는 상견례 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다. 중매인에게 “우리 집안을 어떻게 보고 미용사를 소개시켜줄 수 있지?” 하고 불평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의 공무원 월급을 훨씬 상회하는 수익을 올리고 외국에 다니면서 여기저기 명성을 쌓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나중에는 이런 부탁을 했다.
“혹시 주변에 괜찮은 여자 미용사 있으면 우리 아들 중매 좀 시켜주게!”

 

 

“국제대회 갔는데 만국기에 태극기가 없었죠”
임 명장은 지역에서는 내로라하는 미용사가 되었지만 우물 안에 안주하지 않았다. 1970년대, 임 명장은 한국 미용계에서 도전의 아이콘이었다. 세계 대회에 수없이 도전하면서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외국의 미용기술을 섭렵했다.
“왜 우리나라 국기는 없는 거야?”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위상은 형편없었다. 국제대회가 열리면 참가국의 국기가 걸렸지만, 만국기엔 태극기가 없었다. 항의도 못 했다. 어학실력도 변변찮았고 통역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심지어 통역사가 변변찮아 대회규정이 바뀐 것도 몰랐던 일도 있었다. 1982년 파리 국제 미용경기대회에서 한국대표로 출전을 했을 때 일이다. 이전에는 무대에 올라가서 머리를 말았지만, 그해부터 사전에 롯드(파마할 때 사용하는 막대모양의 도구)로 머리를 말고 있다가 무대에서 롯드를 풀고 컬을 심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규정이 바뀐 것을 모르고 바구니에 롯드를 넣고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했다. 한국팀을 제외한 팀들의 모델은 하나같이 머리가 롯드로 말려진 상태였다.
“대회 규정이 바뀌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죠”
언어의 장벽 때문에 대회를 망친 것은 몇 차례 더 있었다. 87년 뉴욕에서 열리는 I.B.S 대회에서는 대회장에도 못 들어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문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길을 지나가는 여성에게 부탁한 것이 화근이었다. 대회 사진을 보여주면서 손짓과 발짓을 섞어서 부탁하니 여성은 흔쾌히 승낙했다.
“평소보다 더 쉽게 모델을 구해 ‘이번 대회는 잘 풀리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회장을 들어가기 전까지 안심해서는 안 됐어요.”
대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모델이 1층에서 친구와 점심을 먹고 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1층에서 점심을 먹으면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녀오라고 했다. 그런데 1시간이 넘도록 모델은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1층 식당을 뛰어다니며 찾아다녔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모델은 대회장 문이 닫힌 후에야 호텔로 돌아왔다. 1층에 친구가 와 있으니 밖에서 점심을 먹고 오겠다는 뜻이었다.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그날 대회는 망쳤다.
“내가 고생해야 후배들이 편하다”
시상대는 에베레스트보다 높아보였다. 그럼에도 세계 대회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로 머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고생해야 후배들이 편하다”는 신념도 있었다. 개척자 정신이었다.
“실제로 외국의 실력자들의 작품을 보면서 배우는 점은 많았어요. 당장 들어가는 비용보다 세계 무대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의 값어치가 더 컸습니다.”
대회에서 배운 지식은 한국에서 와서 공유했다. 이후에도 눈에 띄게 실력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미용계는 조금씩 발전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교수로 온 미용사가 임 명장 앞에 무릎을 꿇은 일이나 1982년 I.N.A.C 프랑스 국립 미용 연구원에 있을 때는 프랑스 선생도 “임 선생님의 작품은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며 극찬을 받은 사례가 대표적인 예였다.
“미용인들의 도전과 노력이 언젠가 빛을 발한다고 믿었어요. 권기형 명인이 201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OMC헤어월드챔피언십 대회에서 종합 1위를 차지한 것도 선배들이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임 원장님 아니면 누가 명장을 합니까”
명장 도전은 해외 미용대회 도전만큼이나 험난했다. 처음 명장 제도가 생겼을 때 미용 명장의 자격 요건은 20년 이상의 경력과 1급 미용사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1급 미용사 자격증은 전문대학 이상을 나와야지 취득할 수 있었다. 경력이 20년 이상 되는 미용인들 중에 대학을 나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도 명장을 신청하지 못했다. 결국 2000년도에 들어서 1급 미용사 자격증이 아닌 기능장으로 바뀌었다.
2002년 첫 미용 명장이 선정된 후 임 명장도 신청을 했지만 선정에는 실패했다. 그때 마음으로 명장으로 포기했다. 2006년에 주변에 “명장을 단념했다”고 알리자 미용사들이 발 벗고 나섰다.
“임호순 선생님께서 명장이 안 되면 누가 명장이 됩니까?”
후배 미용인들은 임 명장의 약력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줬다. 명장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발간해야 했다. 임 명장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5천만원을 지원받아 교제를 발간했다. 그가 발간한 책은 대학 강의 교재도 쓰였다. 책까지 발간한 그는 명장이 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2004년 대한민국 4번째, 대구 최초로 미용명장이 되었다.
“학문과 기술 함께 익히는 시스템이 공고해져야”
임 명장의 꿈은 명장 타이틀에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미용의 위상을 변화시킨 주역으로 활동한 만큼 앞으로 후배들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적극 후원하고 도울 생각이다. 우리나라 미용이 세계에서 우뚝 서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일찍부터 시작한 작업이 있다. 바로 이론적 체계를 정립하는 작업이었다. 80년대만 해도 대학에 미용과가 있는 곳은 전무했었다. 기술은 학문적인 연구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자 목표가 생겼다. 교육부에 미용과를 승인해달라고 요청을 했고 오랜 요청 끝에 1993년 경북과학대학에 뷰티디자인과가 생겼다. 산업자원부 장관과 대통령에게도 청원을 해 경북대학교 경영학 과정에 미용과를 넣었다.
“해외의 미용 현장을 견학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점은 학술적인 연구가 바탕이 된 나라가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한국은 기능에 치중되어 있었죠. 외국처럼 우리나라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면 더 일찍 세계에서 우뚝 설 수 있었을 거예요. 무엇보다 대학에서 기능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이론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마이스터의 나라 독일을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았다.
“독일의 명장들은 중학교 때부터 학문과 기술을 함께 배워요. 우리나라도 이런 시스템 구축돼 미용으로 세계에서 우뚝 섰으면 좋겠어요.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힘 닿는 데까지 열심히 응원하고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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