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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들었다고 다 사실은 아니다

세상으로 난 창 - 대안 성탄 메시지

  • 입력 2021.01.05 00:00
  • 기자명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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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초 영국 Channel4가 방영한 '대안 성탄 메시지' 프로그램에서 딥 페이크 기술로 '감쪽같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분장한 배우가 틱톡 춤을 추고 있다. 사진 속 작은 사진 왼쪽은 실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오른쪽은 대역 여왕이다. 사진=Channel4 영상 캡처

해마다 성탄절이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국가 국민에게 성탄 메시지를 발표한다. 이에 때맞춰 영국의 준공영방송 채널4(Channel4)는 ‘대안적 성탄 메시지(Alternative Christmas Message)’를 방영한다. 채널4는 1981년 설립한 비영리 독립 민영방송으로 BBC, ITV와 함께 영국 공영방송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 대안적 성탄 메시지는 채널4가 1993년부터 방영해 온 장수 프로그램. 2~5분의 짧은 분량이지만 대중적 관심도 높은 인물이 출연해 민감한 주제도 거침없이 다룬다.

 

‘대안 성탄 메시지’의 파격

올해 대안 성탄 메시지의 출연자는 놀랍게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었다. 여왕은 간단한 얘기를 마치고는 곧장 버킹검 궁의 대형 성탄 트리와 벽장식을 배경으로 화려한 틱톡(TikTok) 춤을 췄다. 영연방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94세 여왕이 신세대 틱톡 춤을 추다니. 여왕은 방송을 통해 이미 예고된 대로 가짜(fake)였다. 여배우 데브라 스티븐슨이 시각 특수효과 스튜디오에서 음성 연기를 하고 딥 페이크(deep fake) 소프트웨어의 그래픽 처리로 얼굴은 물론 머리 모양새, 옷차림까지 감쪽같이 여왕으로 매핑(mapping)하여 분장한 것.

대역 여왕은 춤추기 전후 "오늘 나의 메시지의 주제는 진실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믿어라”면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항상 그렇게 보고 들리는 것 그대로인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라”고 말했다. 끝부분에서는 음성 연기 중인 데브라의 모습과 분장한 대역 그래픽 여왕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실제 여왕이 아니라는 점을 공개했다.

대역 여왕의 틱톡 춤은 코로나19 확산으로 거의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영국의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고령의 여왕이 춤추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창의력과 상상력, 이를 용인하는 사회적 포용력이 부럽다. 우리나라였다면 아마도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 경거망동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 않을는지. BBC로 대표되는 영국의 방송 영상 산업은 세계 방송 시장의 4.6%를 점유하면서 여전히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다다익선과 과유불급

올해 대안 성탄 메시지를 주목하는 이유는 ‘페이크 여왕’이라는 쉽고도 실감나는 소재와 형식으로 가짜 뉴스의 심각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채널4 프로그램 책임자인 이안 카츠는 "이 메시지가 가짜 뉴스와 조작된 메시지의 우려할 만한 잠재력을 충분히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페이크 여왕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상기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대역 여왕이 강조한 것처럼 지금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시대다. 다다익선의 정보 폭증 시대에 날마다 쏟아지는 정보를 다 살펴보고 확인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중 극히 일부의 정보를 접하고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가 쏟아질수록 더 많은 정보를 통해 더 크고 넓은 보편적 진실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쪽으로 더 쏠리고 치우친 정보의 벽 속에 갇히는 역설이 성립한다. 혼란과 갈등, 거짓과 기만이 더욱 판칠 수 있는 과유불급의 정보 과잉 시대다.

4년 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이 사전은 탈진실을 ‘여론이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이나 감정 호소에 더 큰 영향을 받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사람들은 사실과 거짓의 경계는 모호해졌다고 생각한다. 쉽게 추측을 말하지만 입증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는 지나치게 높은 검증 기준을 들이대고, 자기 의견에 부합하는 사실은 덥석 믿는다.

 

출처 신뢰성 확인, 필자 전문성 평가

인지 부조화, 확증 편향, 집단 동조, 의도적 합리화, 역화 효과, 더닝 크루거 효과…. 가짜뉴스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해주는 논리적 틀이다. 이와 관련해 리 매킨타이어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포스트트루스(post-truth)에서 가짜뉴스를 가려내는 일곱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1) 저작권을 확인하라. (2) 여러 출처를 통해 확인하라. (3) 출처의 신뢰성을 평가하라(예컨대, 충분히 오래 인정받았는지 확인하라). (4) 정보의 게시 일자를 확인하라. (5) 주제에 대한 필자의 전문성을 평가하라. (6)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라. (7) 현실성 있는 내용인지 의심하라.

대역 여왕이 가짜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딥 페이크 기술로 분장한 대역의 얼굴을 화면에서 가려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 분별은 개인이 아닌 언론이 해야 맞다. 딥 페이크를 가려낼 딥 저널리즘(deep journalism)이 절실하다. 하지만 국내 대부분의 언론은 어느 편에 속해 있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개인의 몫이다.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않는 사회에서 정보를 가려내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개인이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은 매우 크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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