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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처럼 가벼운 삶은 '이생'에서 얻는 1차적 구원

책 읽기 좋은 날 - 깃털처럼 가볍게 살아라

  • 입력 2021.01.05 00:00
  • 기자명 백윤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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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깃털처럼 가볍게 살아라

마음이 무거워서였을까. 유튜브를 보다가 만난 마스노 슌묘의 『깃털처럼 가볍게 살아라』는 책이 마음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크리스천으로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불교와 선(禪)의 지혜를 전하는 책이 삶에 도움이 될 것 같았고, 20여 년 배워온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비교도 하고 싶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비교에 의해 생기는 망상이다. 이에 빠진 상태를 '마음의 대사증후군이라 하며 현대사회는 이 병이 만연해있다. 주된 증상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망상에서 벗어나면 마음이 가벼워져 평온으로 채워질 것이다. 하나씩이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은 망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불교와 선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서문의 내용이다.

 

크리스천에게 불교와 선이란

사람에게는 뛰어난 점도 모자란 점도 있다. 모자란 곳에 눈길이 가 있다면 뛰어난 곳으로 초점을 옮겨라. 장점을 갈고닦으면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저마다 절대적인 생명을 내려 받아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곳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상보다 자기 발밑을 응시하라.

남에게 질 수 있는 사람은 열등감이 없다. 승리와 패배를 뛰어넘어 자기 삶을 사는 인생을 승부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가장 가볍고 산뜻한 삶은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는다.

끽다영반. 차를 마실 때는 차를 마시는 데만,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는 데만 성심을 다하라는 뜻의 선어(仙語)다. 지금 해야 할 일에 마음을 쓰고 정성껏 열심히 하면 마음에 불순물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면 삶에 리듬이 생긴다. 망상도 무료할 때 생기기 쉽다.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에는 화로가 쓸데없고 겨울에는 부채가 쓸모없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면 모두 유용한 물건이 된다. 나의 때를 위해 자기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주어진 생명을 그대로 살아간다.

안횡비직(眼橫鼻稷). 눈은 가로로 달려있으며 코는 똑바로 달려있다는 뜻으로 당연함을 뜻한다. 당연함이 진리이자 불법의 진수다.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커다란 힘이 그렇게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깨달아 주어진 그대로 받아 소중하게 여겨나가면 된다.

머리로 생각하기보단 우선 행동하라. 체감은 자기를 성장시키는 원점이다.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인공은 중심적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깨달은 자기라는 뜻이다.

실패와 좌절은 발견이다. 실패나 좌절은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원인을 정확히 검증하면 잘 되는 방법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

남보다 위이고 싶다는 잠재의식을 끊는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에게든 동등하게 불성이 있다. 불성에는 우열이 없다. 번뇌가 많으면 그만큼 큰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남의 말과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서로 인정하며 살아간다.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

상대를 적이 아닌 절차탁마하는 상대로 보면 격려 받고 격려할 수 있다. 사람은 오늘부터라도 변할 수 있다. 수행에 끝은 없다. 맑은 시내는 흐름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맑은 것이다. 오무호오(梧無好惡).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 좋고 싫음이 없다.

 

나 자신에 대한 확신,기쁨 충만

오늘날 사회는 신체의 대사증후군이 그렇듯이 마음의 대사증후군이 증가한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남의 말과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다. 인간의 깨달음은 서로 통한다니 마음 뿌듯하고 힘이 솟아났다. 종교의 관점에서 기독교가 신의 영역이라면 불교는 인간의 영역이라고 할까.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한 확신과 신뢰, 기쁨이 더욱 충만해 졌다.

마음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깃털처럼 가볍게 사는 것이 '이생'에서 얻는 1차적 구원이라면 신의 영역에서 스스로 질문해 확실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저생'에서 얻는 2차적 구원이 아닐까.

 

백윤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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