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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따뜻해진 돌담 소 풀 먹이던 산 아래 번지는 노을빛·저녁연기

고향 이야기 그림 엽서 같은 추억의 원형

  • 입력 2020.10.25 00:00
  • 기자명 정종숙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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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의 역과 터미널, 거리 곳곳에는 추석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펼침막이 내걸렸다. 사진=한국일보db

추석이면 어김없이 내 고향 의령 갑을리로 성묘를 간다. 어릴 때는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차멀미를 하며 하루가 꼬박 걸려 도착하 던 두메산골이었다. ‘덜커덩 덜커덩 털털…’ 머리를 버스 차창에 부딪 히며 마음은 몇 번이나 고향 마을에 닿을 듯 앞서가던 자갈길 비포장 도로였다. 그렇게 마을 어귀 공터에 기진맥진하여 도착하고도 한 시간여를 또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길이 시원하게 놓여서 승용차로 드라이브하는 느낌으로 황 금들녘을 감상하며 편안히 마을 어귀 정자를 지나 산중턱에 있는 산소로 바로 올라갈 수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섯 여섯 살 즈음 동생이 태어나면서 두어 해를 나는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어릴 때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살았던 경험은 고향에 대한 선명한 복습이 된 것 같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그리고 초등학교 방학 때마 다 갑을의 깊고 우거진 자연은 몸과 마음이 함께 뛰어논 어릴 적 놀이터였다.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하룻길 버스 내려 한 시간 더 올라가야 

털털거리는 버스에서 내려서던 마을 어귀 넓은 공터. 여기엔 문득 문득 혼자였던 여섯 살 여자아이의 기억이 소복하다. 할머니에게 맡 겨진 게 푸근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서럽던 여자아이는 혼자 놀거나 동네 언니들과 마을 여기저기서도 놀았다. 그러다 공터는 명절이 되 어야 할머니댁에 오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해질녘 어둠이 내릴 때까 지 오도카니 앉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곳이었다. 어느 명절에는 결 국 오지 않는 부모님에게 서운함을 표시할 길도 없이 그냥 그런 명 절들을 뚱하게 보내곤 하였다. 고향에 맡겨져 있었던 시간들이 주마 등처럼 지나간다

할머니의 방은 동네 할머니들의 수다방이었던 것 같다. 긴 곰방대 에 담뱃잎을 꾹꾹 눌러 넣고는 후후하고 뿜어대면 방안엔 연기로 가 득한 가운데 기침 쿨럭 쿨럭하며 ‘누구네 집 아들은 이번에 왔는데 도시에서 일을 해서 돈 많이 벌었다’느니 ’어느 집 딸은 공장에서 일해서 재봉틀을 사왔 다’는 등등 동네의 소소한 일상들을 주고받으며 긴 밤을 보내는 곳이었다.

여섯 살 아이의 기억 속엔 할머니가 자상하거나 정 많고 말 재주 많은 분은 아니었 는데 어떻게 동네 사랑방이 되어 어른들이 매일 밤 모여드는지 이상하였다. 저녁 마 실나온 어른들은 여섯 살 아이에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동네의 흉한 소문들을 주고 받기도 하였다.

아침이면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해 한편에 모아놓은 솔잎 불쏘시개에 불을 댕기느라 불어대는 할머니 입 바람 소리와 가마솥 뚜껑 여닫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할아버지 방 아궁이 가마솥에 소여물 삶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를 반기는 소 울음소리, 이미 새벽을 열어놓은 수탉들의 ‘꼬끼오’ 소리들로 시골아침은 시작된다.

잠결에 듣는 솔잎 불댕기는 입 바람소리

시골밥상은 대개 어른들이 드시기 좋은 나물반찬이어서 내가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밥과 쌀뜨물로 만든 구수한 숭늉뿐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맛있던지 반찬이 필요 없을 만큼 숭늉은 구수하였다. 할머니의 면박에도 고집을 부려 밥과 숭늉만을 들고 툇마루로 나가 앉아 청명한 하늘에 떠있는 여러 모양의 구름들을 바라보며 밥 한 숟가락에 숭늉 한 모금씩 먹곤 하였다. 할머니 집은 높은 곳에 있어서 아래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다른 집들과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한강변을 내려다보 는 그림 같은 전망이었다. 심성도 감수성도 그때 눈으로 먹고 담았던 산골 마을과 자 연 풍광이 바탕이고 재료였구나 싶다. 그 시간이 여섯 살 꼬맹이에겐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며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밥을 먹고는 소 풀 먹이러 가는 동네 언니들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 소들이 풀을 먹 고 있는 동안 편을 나누어 비석치기, 사방놀이, 제기차기, 그리고 자치기 등을 하고 놀 다보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먼 산에서는 노을빛 하늘에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그림엽서가 만들어진다. 지금도 나는 그 그림엽서 같은 노을빛이 좋다. 소들은 내려가는 산길 바윗길 층층이 소똥을 퍽퍽 누면서 놀라 소스라치게 만들고, 언니들은 내일 보자며 집으로 흩어져 헤어진다.

감성 풍부한 소녀로 만들어준 풍경들

다시 저녁이다. 좋아하는 보리밥과 쌀뜨물숭늉을 들고 또 툇마루로 나가 석양의 먼 산을 바라보며 밥을 먹는다. 그때부터 나는 해질녘 노을이 좋았나보다. 산과 들이 펼 쳐 보여주는 사계절의 멋을 그때부터 알게 된 것 같다. 지금도 주말이면 산과 들을 찾 아다니며 아름다운 어릴 적 고향 같은 곳을 만나면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 무렵에는 다 그랬지만 할머니는 남존여비 관념이 강했다. 맛있는 쌀과자를 만들 어 놓았다가 오빠 둘이 놀러 오면 내주셨다. 나는 그때야 오빠들 내주는 틈을 타서 겨우 하나씩 쌀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중년이 된 지금도 그 과자를 보면 그때를 떠올린다. 아련한 추억과 입안을 녹이던 맛에 아직도 서운함과 원망스러움이 뒤섞인다. 내 고향에서 느끼는 추억과 행복은 사람 인심보다는 동네 마을 공터, 산등성이 놀 이터, 마을 골목 돌층계, 햇볕 내리쬐어 따뜻하게 데워진 돌담, 그 위에 살포시 떨어 져 얹힌 잘 익은 홍시와 감나무들, 초 칠한 송판으로 미끄럼 타고 놀던 마을 묘지 위, 작은 아이는 탈 수 없는 큰 느티나무에 매달린 그네 들이 여섯 살 꼬맹이에게는 다 헤 아릴 수 없는 정서적 안정감과 풍요로움을 안겨준 안식처였다. 지금 이 나이에도 가끔 감성 풍부한 소녀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야말로 감사한 일이다. 고향 이야기 하 면 떠오르는 그림들이다.

이젠 다큰 딸아이와 열어보는 추억창고

한창 부모님 사랑 받아야 할 나이 인데도 챙김도 못 받고 응석을 부리지 못하며 지 낸 어릴 적 몇 년간 내 고향 갑을에서의 자연 속 놀이터가 무엇보다 나에겐 큰 자산이 되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다 큰 딸을 데리고 자랑삼아 이곳저곳 어릴 적 놀던 곳을 보여준다. 그때 놀았던 이야기와 그때의 느낌까지 추억의 저장창고에서 하나씩 끄집어 내다보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모녀는 흐뭇해진다.

코로나로 지치고 피곤한 일상을 이번 추석 내 고향 의령 갑을 그림엽서에 나오는 석 양을 보면서 ‘훅’ 날려버릴까 한다. 몇 장의 그림엽서를 뒤적일 수 있어 이 낯선 ’비대면 귀성’이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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