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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참담한 슬픔 견디게 한 미술 대명동 풍경 소재 판화 29점 선보여

문화 현장 서울서 첫 전시회 여는 젊은 화가 김동욱

  • 입력 2019.05.16 00:00
  • 기자명 김윤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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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서 첫 전시회 여는 젊은 화가 김동욱

지난해 대구미술관에서 열렸던 김환기전(展)은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작품 108점을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드문 기회였다. 그의 붓끝에서 선과 면은 달, 항아리, 바다, 나무, 새, 꽃으로 피었고 수많은 점은 필생의 역 작인 전면점화(全面點畵)로 빛났다. 한국적 정서와 주제는 서구 모더니즘추상표현주의와 틈새없이 어우러지면서 보편성의 영지를 넓혔다. 얼마 전 한 연구는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선과 면, 점 등의 구성 요소들이 그가 고향 신안군 안좌도에서 어릴 적 보았던 풍광과 기억에서 비롯했음을 밝혀냈다. 회화에서 선과 면, 점을 들여다보는 일은 대개 작가의 기억을 근원에서 더듬어 닿게 한다.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에 민감하다

젊은 미술가 김동욱(31)은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에 민감하다. 그의 선은 ‘상실 모티프’로서 부재의 대체물이다. 부재 를 감추면서 사실은 드러내는 고백이다. 그것은 김환기가 서울에 살면서 안좌도의 기억을 그렸고, 파리로 이주해 서 울을 그렸던 시차와 같다. 김동욱에게 선은 가장 단순화한 그리움의 기호, 지금은 없는 것들을 불러내는 휘파람이다. 그의 선은 그가 잊지 못하는, 그리고 이미 잊어버린 기억의 근원이다.

그는 4월 10~16일 판교 H Contemporary Gallery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판화 22점과 드로잉 7점, 모두 29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갤러리 전시 공모에 기획서를 제출해 응모했는데 초심자인 그가 어려운 심사를 통과했다. ‘결혼 전야’에 비유할 만큼 설레고 긴장된다는 전시회 전날 그를 만났다. 첫 전시회라서 더욱 그렇겠지만 며칠째 밤잠을 거의 자지 못했단다. 

“제가 살고있는 도시 속의 일상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5년 동안 머물렀던 앞산 아래를 이제 떠나야 하는 순간, 그리 지 못한 선들이 다 갚지 못한 빚처럼 몰려왔어요. 저는 이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3년은 레스토랑을, 2년은 카페를 운영 했어요. 마지막 1년은 미술 작업실로만 썼고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 이곳으로 출근해서 저녁까지 저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죠. 매출과 사는 일을 고민했고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도 했고 그림 작업 중에 개들과 공놀이도 했죠.” 

아무 것도 몰랐던 그때의 아픈 기억 

전시회를 계기로 서울로 옮기기로 한 그는 27년을 살아온 대구, 그 중에서도 카페 겸 화실이 있었던 앞산 아래 대명동 풍경을 하나라도 더 기억해두고 싶었다. 그래서 전시회를 위해 새로 작업한 작 품과 이전의 작업에서 골라낸 작품들의 소재가 대부분 대명동과 앞산의 풍경이다. 

1988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4살 때 어머니의 친정인 대구로 이사 왔다. 집은 범어동. 어려서부터 그의 꿈은 미술가였다. 대구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그는 ‘꿈을 안고’ 미국으로 갔다. 한국 미술 교육의 현실 ‘100가지’를 고민한 어머니의 선택이었 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예술대학교(Academy of Art University)에서 텍스 타일 디자인 전공으로 미술학 학사(BFA) 학위를 받았다.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노 팅엄 트렌트대학교( Nottingham Trent University)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으로 미술학 석사(MA) 학위를 받았다. 앞산 아래 카페 겸 화실을 연 것은 귀국 후. 현재 대구대 박사 과정 재학 중이다.

어떤 램(기억소자)은 전원이 꺼지면 모든 기록이 사라진다. 기억만 휘발성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 역시 휘발성이다. 그는 두 살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형을 함께 잃었다. 그와 어머니는 서울 집에 있었고 아버지와 형은 대구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30대, 형은 네 살이었다. 두 살이던 그는 그때 참담한 상실과 슬픔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술을 전공한 어머니는 이전부터 그림을 그려왔지만 그 무렵부터 대부분의 시간 집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외가가 있는 대구로 내려온 것도 그 무렵이었고요. 저 또한 어머니 옆에서 같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따라하는 놀이나 투정이었죠.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 받았는지 여섯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는 게 제법 일상이 된 것 같아요.”

독특한 화법, 독특한 운필

그에게서 미술 재능을 본 것은 어머니만이 아니었다. 친누나·동생처럼 친하게 지 내던 사촌누나가 그를 눈여겨봤다. 일곱 살 많은 사촌 누나는 중학교 졸업 후 미국으 로 유학해 시카고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누나는 미국에서 미술공부를 하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다며 미국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 어머니와 그가 그의 미국행을 결정한 데에는 사촌누나의 영향이 컸다. 지금도 사촌누나는 그의 열렬한 후원자다.

“저는 그림을 그릴 때 절대 지우지 않습니다. 지울 수 있는 연필은 아예 사용하지 않고 마커, 먹물, 잉크 등 지울 수 없는 색 재료를 사용합니다. 실수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그 위에다 계속 그립니다. 그림을 중첩하는 거죠. 그러면 실수나 잘못, 미흡함이 도리어 예상할 수 없었던 독특한 그림으로 재탄생합니다. 지웠다면 얻을 수 없는 그림이죠.” 

그의 운필(붓놀림)은 독특하다. 물감이 다할 때까지 화폭에서 붓도구(마커, 잉크, 먹물 등)를 떼지 않는다. 화폭의 아래쪽에서 그린 다음 위쪽으로 올라가 그리려 할 때에도 붓을 떼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 붓의 이동 흔적이 그대로 남는다. 그림이 엉망이 될 것 같지만 그 자체가 리듬있고 생생한 그림이 된다. 칸투어 드로잉(contour drawing) 기법이다. 미국 미술대학 드로잉 시간에 그가 많이 배운 것이다. 

젊은 그가 도달한 삶의 비의 

첫 전시회에 선봬는 작품들은 이런 그의 작업 특성을 잘 보여준다. 직선과 사각형들은 부딪고 합치고 엇갈리고 겹친다. 그는 ‘멍 때리는 게’ 습관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그는 수없이 창밖을 응시했고, 밖에서 창안을 들여다봤다. 달리는 차 안에서 는 응시할 수 없으므로 사진을 찍어 나중에 들여다본다. 중첩하는 그의 직선과 사각 형들은 대명동과 앞산, 카페 건물들과 순환도로의 아무것도 지우지 않은 풍경이다. 

아무 것도 지우지 않은 온전한 기억. 그 기억은 간절한 그리움이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배제되거나 박탈되지 않는 충만하고 완결적인 세계가 그의 그림 속에서 중첩 한다. 두텁고 안정적인 바탕색과 그 위를 자유롭게 유동하는 섬세한 결은 그의 탄탄한 사유를 보여준다. 그의 화면은 모든 기억을 저장한다. 젊은 그가 도달한 휘발하는, 유동하는 삶의 비의가 놀랍다. 그의 판화가 드러내는 선과 면, 그리움의 기억, 그 양상과 변화에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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