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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안에 작사, 작곡, 가수 섭외, 녹음까지 60년대 아시아를 홀린 히트곡으로

가요따라가요 쟈니 브라더스

  • 입력 2019.05.16 00:00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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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사댁 셋째 딸’이라는 노래를 우리나라 사람이 작곡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토속적인 가사 때문 일 것이다. 

대만에도 그런 노래가 하나 있다. 번안곡인데 대만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어, 그거 대만 노랜데?”할 가능성이 높은 곡이다. 원곡은 우리나라 가요이고, 대만으 로 건너간 지는 50년쯤 됐다.

여기까지 들으면 상당히 공을 들여서 만든 대곡이었겠다 싶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작곡과 녹음이 거의 즉흥적으로 결정돼 일사천리로 진행된 곡이다.

아침에 “작곡해 주시오!” 저녁에 녹음 완료 

1963년, 여름이 막 시작되는 즈음이었다. 모 영화사에서 작곡가 황문평씨에게 가사를 한편 주면서 작곡을 의뢰했다. 요구 사항이 조금 황당했다.

“오늘 중으로 만들어서 주시오.” 

그것도 아침에 전화해서. 배우들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작곡가는 부랴부랴 작곡을 했다. 작곡을 하면서 생각해보니까 문제가 하나 더 있었 다. 가수가 없다는 것. 그는 방송국에 음악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경우는 방송국에 나와 있는 가수들이 당첨되는 경우가 많다.

렇게 서너 시간 만에 작곡을 했고, ‘마침’ 방송국에 나와 있는 가수를 즉석 섭외해서 녹음에 들어갔다. 시간이 촉박해서 연습도 몇 번 못 했다. 영화사에서도 별로 기대를 안 했던 듯하다. 감독, 혹은 제작진 중에 한 명이 “배우들 이 이 대목에서 노래 부르면서 연기하면 좋겠는데요”하면서 불쑥 아이디어를 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기보다 ‘그냥 있으면 좋은 정도’로 만족했을 것이다. - 요구 조건부터가 그랬으니까.

영화는, 그리고 영화음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결과는? 영화는 대박이 났다. 이듬해 개봉해서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외국으로도 수출했다. 주연 배우는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계에선 이 사람을 “대한민국 최초의 한류 스타”라고 말한다. 

가요사에서는 더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몇 시간 만에 만든 주제가, 그리고 세 번도 채 연습 못 하고 녹음한 이 노래는 동남아, 일본까지 소개된 최초의 한국 대중 가요로 기록됐다.

노래를 부른 사람, 아니 사람들은 쟈니 브라더스였다. 이들이 부른 노래의 제목은 ‘ 빨간 마후라’. 영화의 제목과 같다.

유 장군은 1951년 10월에 전투 조종사로 첫 출격을 했다. 6.25 전쟁 중 한국 공군 역사상 유일하게 203회 출격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52년 1월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서 지상에서 450m 높이로 초저공 비행을 해 철교를 폭파했는데, 이것이 유엔 공군이 500번을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했던 임무였다. 전쟁 중에 미국 공군 비행훈장을 비롯해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영화가 개봉된 이듬해 과로로 순직했다.

시시해 보이던 조종사들, 존경하게 된 계기 

나는 공군 사병으로 군복무를 했다. 근무처는 예천 공항이었다. 부서는 작전과 비상 대기실 행정병이었다. 비상대기실에는 조종사들이 24시간 대기했다. 우리 영공에 미확인 비행체 들어오면 각 전투 비행단에서 순식간에 전투기가 이륙한다. 몇 분 만에 이륙해야 하기 때문에 밤에도 대기를 한다.

하루 종일 조종사들과 같이 지낸 셈인데, 처음에는 만만해 보였다. 나이도 얼마 차이가 나지 않고 이런저런 잡담을 듣다보니 처음 장교를 봤을 때만큼이나 대단해 보이 진 않았다. 잡담이라는 것이 웬만하면 수준이 높을 수 없는 까닭일 것이다. 게다가 가끔 야한 비디오를 가져와서 보기도 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하는 ‘작품’은 조종사 들 사이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전율을 일으키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날도 전투기 조종사들 이 잡담을 나누었는데, 어쩌다 주제가 흐르고 흘러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하는 데 닿았다. 그중에 한 조종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 그는 선배였다. 

“일정 지역 이상으로 출격을 하면 그냥 갔다 오면 모를까 공중전까지 치르고 나면 돌아올 기름이나 있을까. 사실은 적기에 격추를 안 당한다면 다 죽는다고 봐야지.”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평소에 싱거운 농담을 잘하던 조종사라서 그 뒤에 나올 말은 아마도 시시껄렁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도 최대한 싸워야지. 죽을 때까지.” 그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나머지 조종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전쟁이 터지면 대개 “싸우러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투 조종사들은 “ 죽음을 각오하고 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윗분들이 훈시 차원에서 한 것이 아니고, 조종사들끼리 사적으로 나눈 말이라는 점이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그 말이 전투기 조종사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조종사들의 맨얼굴을 봤다. 그 맨얼굴에는 유치곤 장군이 드러나 있었다. 전쟁이라 는 극한의 상황에서 도전 정신과 용기를 잃지 않았던 군인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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