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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의 물성과 신성 ‘그가 나를 들여다본다’

문화 현장 이배 전시회

  • 입력 2018.10.27 00:00
  • 기자명 김윤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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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국내 미술계의 최대 관심사는 단색화다. 시장과 화랑가, 비평과 학계의 ‘단색화 애정’은 식을 줄 모른다. 단색화는 ‘한국 현대미술의 고유 브랜드’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단색화는 이름만큼이나 단색으로 정의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단색화라는 명칭부터가 1960~70년대 서구미술과 일본 모노하(ものは, 物派)의 영향으로 들여온 ‘모노크롬(Monochrome) 회화’의 단순 번역 내지 동어 반복이라는 점에서 담론의 빈곤과 방법론의 부재를 드러낸다.

이달 말까지 대구 범어동 피앤씨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재불작가 이배(1956~ ) 전시회는 이러한 한국 단색화의 궁벽한 담론과 방법론을 풍성하게 할 에너지와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거대한 숯을 만나다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 거대한 숯덩이를 만난다. 듣도 보도 못한 크기다. 숯의 높이는 어른 키보다 크고, 몸통은 어른 두엇을 합친 굵기다. 숯의 압도적인 차원이다. 어떻게 거대한 숯을 구우려 했을까. 어떻게 만지면 바스러질 숯을 옮겼을까. 허를 찔린 듯한 전율이 돋는다. 이것이 숯덩이라는 사실을 확인할수록 숯덩이는 낯설다. 이대로 나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겨 흡수해버릴 것 같은 에너지의 자장이 느껴진다. 저 숯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전율의 두 번째 이유는 여섯 채의 거대한 숯덩이가 전시장 가운데 전부를 ‘압도적으로’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하나의 통숯이라는 사실이다. 엄청난 크기의 통숯의 밑동은 전시장 바닥에 그대로 뿌리를 박은 듯 당당하다. 압도적이고 당당한 점령은 ‘나라는 주체의 지위를 위협한다. 숯이 중심이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다. 내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되레 나를 들여다보는 신성 공간에 무단으로 침입한 듯한 낭패감이다. 

전율의 세 번째 이유는 숯이 함축한 의미와 상징의 복합이다. 숯은 벽사(辟邪)의 상징이다. 숯은 삿된 기운을 물리친다. 숯은 정화의 능력이다. 간장 단지에 숯을 띄우고 잡내 잡는 데 숯을 쓴다. 숯은 금기의 표지다. 출산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대문 위 금줄에 숯을 매단다. 숯은 건강의 파수다. 숯을 곱게 갈아 법제 복용하면 해독과 항균작용을 한다. 

모든 색채를 한데 농축하면 진흑(眞黑)의 숯이다. 그러므로 숯은 모든 색채 의미의 합산이자 지움이다. 숯에는 나이테가 사라진다. 숯은 시간이 소멸한 결의 캄캄함이다. 숯은 1,000년, 2,000년의 캄캄함을 섞지 않고 견디다 발견되기도 한다. 1972년 중국 후난성에서 발굴한 2,500년 전 고분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분의 주인공이 죽은 지 4일 정도의 부패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주인공의 관은 5톤 정도의 숯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숯이 2,500년 전 시체의 부패를 막았다. 

똑같은 탄소(숯)로 이뤄진 그을음과 다이아몬드를 가르는 것은 형태적 변용과 경계의 차이다. 숯은 생나무와 재의 사이다. 숯은 삶의 기름이면서 죽음의 당김이다. 재와 불 사이, 삶과 죽음 사이 숯은 백지 한 장 차이의 경계다

은 나무와 재, 삶과 죽음 사이
청도 출신으로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간 작가는 서울과 파리, 뉴욕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숯은 그의 오랜 작품 소재이자 주제다. 그는 2015년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동양박물관이 초대한 <이배에게 백지위임(Carte Blanche à Lee Bae)> 전시회에서도 숯 덩어리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작은 숯 덩어리를 여러 개 합치고 포개고 묶어 완성한 작품이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숯을 국내에서 구워서 공수했다. 이번 전시회 작품은 엄청난 크기의 소나무 통숯을 구워야 했는데 국내에서는 그런 소나무를 구할 수 없었던 것.


작가는 이번 전시회의 통숯 재료로 쓸 굵기의 소나무를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 수입했다고 한다. 소나무를 구우면 수분과 가연성 물
질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부피가 15~30% 줄어든다. 원래의 생소나
무는 지금 보이는 숯보다 훨씬 더 컸다는 얘기다. 나무는 수입했지
만 숯을 굽는 (숯가마) 작업은 작가가 오랫동안 이어온 방식대로 꼭 
가야산 자락 가마에서 한다. 

황토가마 속에 우람한 통소나무를 앉히고 보름 동안 불을 때고 보름 동안 다시 식힌다. 환원불로 굽는다. 환원불은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밀폐된 조건에서 타는 불이다. 환원불은 불 중에서 가장 높은 불이다. 그래서 청자를 환원불로 굽는다. 청자를 굽듯 숯을 굽는 것이다. 나무를 태우면 재가 되고, 구우면 숯이 된다. (타는 장작이나 불붙인 참숯을) 꺼서 만든 숯은 뜬숯이고, 구워 만든 숯이 참숯이다. 전시장은 이번 전시를 위해 노출 형식의 천장을 제외하고 사방 벽과 바닥을 한지로 새로 배접했다. 한지의 순백과 통숯 진흑의 강렬한 대비 말고는 어떤 중간지대도 없다. 전시장에는 작가 이름은 물론 작품 이름도 붙어 있지 않다. 무거운 통숯을 운반할 때 순서가 뒤바뀔까 분필로 우겨넣은 숫자가 하나씩 보일 뿐이다. 한지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모든 기운과 문자와 기호를 차단(배접)했다. 오직 숯덩이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다.


가브리니 거석에서 본 절대 추상
“프랑스로 건너간 후 ‘한국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왜 이것을 했는가’를 끊임없이 스스로 물어야 했어요. 숯은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보편성과 가장 한국적인 개별성을 아울러 가진 소재로 택한 것이죠. 프랑스 가브리니(Gavrinis) 섬의 거석을 보고 얻은 영감의 덕분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옮겼다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돌덩이에서 어떤 기호나 상징도 읽을 수 없는 절대 추상을 보았거든요.”

숯덩이를 칭칭 동여맨 굵은 철사를 벗겨주고 싶었다. 그것은 숯을 굽는 과정에서 숯이 터지지 않게 하려고 얽어맨 철사가 아니었다. 완성된 숯이 혹시 바스러질까 나중에 동여맨 고무줄이었다. 감쪽같았다. 그것은 사실은 내 편견의 깊이. 거대한 숯이 나를 압도한다. 물성(物性)에서 신성(神性)으로. 숯이 나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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