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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던 집의 존재가 커졌다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18.10.22 00:00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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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가졌어도 집을 쓸 줄은 몰랐다. 집은 집안일만 떠올리게 했고, 집에 있으면 아무 것도 안하는 것 같았다. 충족되지 않은 뭔가를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밖에서 찾으려고 했고, 밖에 있는 줄만 알았다. 찬찬히 들여다보며 집을 누리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을 알지 못했고, 집을 보지도 못했다.

영국에 다녀왔다. 여름에도 비가 오고 쌀쌀하기까지 한 영국에서 화창한 날씨는 무엇을 하기에도 충
분한 이유가 된다. 날씨가 좋으니 짐 나르는 것을 도와준 이들을 불러 바비큐를 한다면서, 집주인인 스텔라와 하워드는 우리 부부까지 초대했다. 초대한 사람 2명은 곧 4명이 되더니, 어느새 12명이 되었다고 했다. 그것도 24시간 안에.

“The best things in LIFE are the PEOPLE we love, the PLACES we’ve been and the MEMORIESwe’ve made along the way.” (삶에서 최고는 사랑하는 사람들, 가본 장소들, 그 길에서 쌓은 추억들이다.)


그들의 집에 걸려있는 글이 초대의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다. 장식해놓은 만국기가 누구든지 환영한
다는 사인 같다. 그들은 밥 먹고 잠잘 때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만드는 ‘장소’로도 집을 활용한다. 노랑과 초록이 들어간 테이블보 위에 노랑과 초록의 냅킨과 양초가 번갈아 놓여있고, 노랑의자도 있다. 밝고 환한 테이블 차림이 초대받은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비슷한 친구나 지인이 모이고, 부부동반에도 남녀가 따로 앉는 것을 편해하는데(
중년의 경상도 사람들이라 그럴지도), 영국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섞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젊은이가 유머를 섞어 어른을 놀리니, 모두의 대화가 동등하다. 함께한 장애 있는 젊은이에게 보내는 친절과 배려는 은근해서 동등하다. 하워드가 버거, 소시지, 닭 꼬치, 치즈를 굽고, 스텔라가 쿠스쿠스, 치즈를 넣은 수박샐러드, 야채샐러드를 올려놓으니 식탁이 가득하다. 모두가 앉은 채로, 접시를 차례대로 옆 사람에게 넘기며, 원하는 음식을 원하는 만큼 자기 접시에 덜어내는 행위도 동등하다.  

데릭은 하워드가 차분하다고 했다. 늘 유머를 날리는 모습을 본 터라 의아했는데, 장애인 서포터로 일하면서 갑작스런 일에 대처하는 모습을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그가 은퇴를 고려하면서도 더 일하려는 이유는 의외다. 휴가에서 돌아오면, 전에 일했던 사무실의 동료들은 짧고 상투적인 인사만 하고 곧바로 일하는데 반해, 장애인들은 활짝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벌려 껴안으며 반가움을 전하고, 손수 만든 케이크를 남겼다가 준다고 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과 거짓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순수함이 이유라고 했다. 

스텔라의 이름을 한글로 써서 보여주었더니, 신기하다며 모두가 너도나도 써달라고 한다. 스텔라, 드
니스, 제니, 홀리... 여인들은 글자 모양이 단순한 ‘드니스’보다 조금 더 복잡해 보이는 ‘스텔라’가 멋있
다며 부러워한다. 홀리의 이름을 써주니 “어떻게 읽느냐?”고 묻는데, “홀리는 홀리라고 읽는다”고 답하고 모두 웃었다.옆에 앉은 영국인 셰프가 된장과 고추장을 알고, 비빔밥까지 알고 있어 놀랐다. 내킨 김에 나는 가까운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냄비 채 들고 갔다. 처음 맛보는 라면을 매워하는 각자의 반응들이 재미있어 모두가 또 “하하하” 웃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삼계탕 재료를 선물하고, 끓이는 법을 가르쳐 주고, 고추장과 김 맛도 보여줬다. 

하워드의 마음도 움직였나보다. 3년을 배웠다는 우클렐레를 꺼내와 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칠
십이 다된 나이에 악기를 배우고, 모여서 연습하고, 친구들과 연주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잘할 수 있을까?, 잘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배워서 뭘 할 건데?’ 등 의심이 많은 나와는 다르다. 소박한 음악이 깜깜한 밤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흥미롭다. 밝고 건강하게 삶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닮고 싶다. 함께 나눈 대화가 서로의 거리를 좁혀 그들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던 집에 친구들을 부르니 집의 존재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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