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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달성 찬가 & 대구 찬가

가요따라가요 ‘슈퍼스타’ 이한철

  • 입력 2019.04.09 00:00
  • 수정 2020.11.18 17:13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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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 경북 안동역에 노래비 하나가 세워졌다. 돌에 새긴 노래는 ‘안동역에서’였다. 안동역을 배경으로 한 남녀의 사랑이야기였다.

노래를 부른 가수는 진성이다. 이 노래를 녹음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 이 노래는 고향이 예천인 작사가 김병걸 씨가 안동 사랑 노래를 모은 시디 (CD)를 제작할 때 포함시킨 곡이다. 김 씨가 노래에 가장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가수 가 진성이었고, 부랴부랴 연락해서 한 두 번 연습하고 바로 녹음을 했다. 

진성 씨가 이 노래의 가능성을 확신한 첫째 이유는 내용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사가 좋다는 것이다. 대개 지역을 소재로 한 노래라고 하면 지명이 줄줄이 나 열되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홍보성’이 강해져서 대중들로서는 몰입하기가 힘들 다. 지명이 빼곡하게 박히고도 히트한 경우는 ‘목포의 눈물’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가요사에서 지역을 소재로 한 노래는 늘 인기 소재였다. 몇몇 곡을 제외하면 히트곡 의 반열에 오르진 못했지만 꾸준히 생산된 건 사실이다.

아예 ‘찬가’로 이름 붙여진 곡이 있다. 지명 뒤에 ‘찬가’가 붙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곡은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로 시작하는 ‘서울의 찬가’다.

대구와 관련한 찬가는 두 곡이다. 한 곡도 가지기 힘든 찬가를 두 곡이나 가졌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두 곡 모두 길옥윤이라는 걸출한 작곡가가 만들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곡은 원제가 ‘능금꽃 피는 고향’인 ‘대구 찬가’이고 또 한 곡은 ‘달성의 찬가’ 이다. 길옥윤은 대구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음악인이다.

영원한 나그네 길옥윤, 슈베르트가 생각나는 이유 

길옥윤을 생각하면 슈베르트가 연상된다. 슈베르트는 독일의 낭만파 작곡가로 서 른한 해를 살면서 가곡을 600여곡 작곡한, ‘가곡의 왕’이다. 기악곡에서도 풍부한 선 율을 잘 사용해서 어떤 작품이든 노랫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다. 슈베르트는 지금은 유명하지만 살아서는 그렇게 부하게 살진 못했다. 평생을 친구 집을 전전했고, 변변 한 피아노가 없어서 기타로 작곡을 했다. 삶이 그래서 그런지 작품에는 ‘나그네’나 ‘ 방랑자’로서의 삶을 담은 곡이 많다. 대표작 중 ‘겨울 나그네’가 있다. 그는 대표작 제 목처럼 나그네로 살았다.

길옥윤도 마찬가지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영변이다. 그 유명한 약산이 있는 곳이다.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서울대치대에 입학했다. (당시는 경성치과 전문대학이었다.) 6.25때 잠깐 대구에 피난을 왔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1966년에 귀국한 후 패티김, 혜은이 등과 함께 수많은 히트곡을 낸다. 그러다 1988년 다시 일본 으로 건너갔다가, 94년에야 영구 귀국한다. 그리고 이듬해 작고했다. 

길옥윤은 슈베르트만큼은 아니었지만, 힘든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작사가 정두수(1937년 4월 18일 ~ 2016년 8월 13일) 선생은 그를 추억하면서 쓴 짧은 글에 알듯 모를 듯한 구절 하나는 넣었다.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타국살이… 일본 도쿄의 술집에서 생존을 위한 연주를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전화로 노래를 불러주던 그 남자 

길옥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패티김이다.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다. 김 씨의 고백에 의하면 ‘사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전화기에 대고 불러주면서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1966년 결혼에 성공했다. 그리고 7년 동안 부부의 연을 이어가다 가 73년에 이혼했다.

이유는 성격차이라고 알려졌다. 패티김은 뭔가 계획을 세우고 꼼꼼하게 실천하는 스타일인 반면, 길옥윤은 낭만파였다. (나그네답게) 다소 즉흥적으로 살았을 뿐더러, 한번 술에 취하면 업혀서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정두수 선생은 길옥윤 선생의 대표곡으로 ‘서울의 찬가’와 ‘이별’을 꼽았다. 특히 ‘ 서울의 찬가’는 장례식장에서 패티김이 그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른 곡이기도 하다.

정 선생의 말대로 ‘서울의 찬가’가 성공한 영향 때문인지 지역에 대한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물론 음악 하는 이들이라면 대개 자기 고향 노래 한 두 곡쯤 만들기 마련이 지만, 길옥윤 선생만큼 구체적인 지명을 넣어 부른 노래들이 줄줄이 성공하는 경우 는 드물 듯하다. 이를테면, ‘서울의 찬가’, ‘제3한강교’, ‘능금꽃 피는 고향’을 비롯해, 잘 알려지지 않긴 했지만 ‘대전의 찬가’, ‘부산의 찬가’ 등도 있다. 그중에서 ‘부산의 찬가’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1995년 작고하기 두 달 전에 부산 시장의 부탁으로 만들었 다. 이후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2008년에 부산의 모 주부합창단이 새로 녹음을 했다.

앞서 밝혔듯이, 길옥윤 선생 작품 중엔 대구와 관련된 찬가가 두 곡이 있다. 그중 ‘ 달성의 찬가’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선생이 문희갑(1937 ~ ) 전 대구 시장과 막역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30년 전쯤에 미국에서 처음 만났다. 통성명 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길옥윤 씨가 달성군에서 피난 생활을 한 사연을 밝혔다. 달성군은 문 시장의 고향이었다. 둘은 금세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 후일 길 선생이 대구를 방문했을 때 본인이 피난 생활을 하던 집을 문 전 시장과 같이 찾아가기도 했다. 오가는 길에 문 전 시장이 간곡한 부탁 하나를 했다. 찬가 하나를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가사는 본인 이 직접 적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이 ‘달성의 찬가’였다.

70년대 아이돌 혜은이가 부른 ‘감수광’ 

여기서 잠깐 사족을 달자면, 길옥윤이 만든 지역 노래 중에 가장 히트한 노래는 ‘감수광’이 아닐까 싶다. ‘감수광’은 제주도를 소재로 하고 있고, 제주도 출신인 혜은이가 불렀다. ‘감수광’을 듣고 있으면 정말 제주도에 가고 싶다. 재밌는 건 혜은이가 ‘70년대 이효리’란 닉네임이 있는데, 현재 가장 유명한 제주도 주민이 이효리 씨다. 뭔가 인 연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성에 가면’도 길옥윤 선생이 지은 곡인데, 이 곡도 좀 특이하다. 이 곡의 원래 제 목은 ‘LA에 가면’이다. 그런데 정부에서 외국어를 못 쓰게 하는 바람에 한자어인 나 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나성’이란 단어가 전혀 낯설게 느 껴지지 않는다. 타국으로 떠나는 연인에게 건네는 말이라기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의 노랫말과 멜로디에는 낯선 곳을 마치 고향처럼 느끼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듯하다.

그는 평생을 방랑자로 살았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대구에 피난을 왔고 20년을 일 본에서 살았다. 그리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쉰 곳은 부산이다. 슈베르트처럼 전형 적인 나그네가 아니었나 싶다. - ‘이별’을 노래한 곡에서도 가사에 ‘산을 넘고 멀리 멀 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하는 대목이 있다. 사람과의 이별마 저 고향을 떠나 방랑하는 것에 접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나그네의 심정이 지역을 담은 노래들을 성공시킨 정서적 요인이 아닐까. 삶의 터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가족들이 뿌리박고 사는 곳이 얼마나 정다운 곳인지 길옥윤처럼 잘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의 노래에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그토록 아 름다운 곳인가’하는 깨달음을 주는 힘이 있다. 

전쟁과 도시화로 나그네가 된 국민들 

돌이켜보면 1950년 이후 우리는 고향을 떠나는 삶을 살아왔다. 전쟁으로 수많은 실향민이 발생했고, 60년대 이후 산업화로 젊은이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과 거에도 나라가 망하거나 여러 경제적 여건의 변화로 살던 곳을 떠나는 일들이 많았지 만, 최근 100년보다 더 고향을 떠난 사람이 많은 시절은 없었을 것이다. 서울을 비롯해 그가 ‘찬가’를 지어준 지역의 시도민들은 그의 노래 덕분에 새롭게 뿌리를 내린 지역에 보다 쉽게 정을 붙이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패티김의 히트곡 하나를 이야기하면서 길옥윤씨에 대한 이야기를 맺 을까 한다. 길옥윤의 아내였던 패티김의 히트곡 중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하 는 곡이 있다. 이산가족찾기를 상징하는 노래다. 이 노래가 패티김을 통해 다시 히트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곡의 작곡자는 박춘석이다. 박춘석은 길옥 윤이 처음 음악을 시작할 즈음인 45년 무렵에 결성한 ‘핫팝’이라는 3인조 그룹의 멤 버였다. 절친한 음악 친구였던 것이다. 박춘석이 만든 음악을 옛 아내가, 또 대부분 이북에 가족을 두고 떠나왔을 사람들이 등장하는 방송에서 울려 퍼졌다는 건 의미 심장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길옥윤에 대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이렇게 대 답하고 싶습니다. - 평생을 나그네로 살면서 가장 낭만적인 선율을 만든 사람. 누구 보다 많은 고향 찬가를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 떠 도는 모든 사람들, 타향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유민들에게 마음으로 위로 를 건넨 사람. 

길옥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깊은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그런 나그 네의 정서에서 비롯된 공감대에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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