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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의 영원한 ‘껌딱지’입니다

내 인생의 히트곡 윤영애 대구시의원, 태진아의 ‘사모곡’

  • 입력 2019.04.05 00:00
  • 수정 2020.11.18 11:45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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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이틀씩이나 늦었어요?”

어머니는 일찍부터 장사를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보부상으로 변신했다. 한번 장사를 나가면 2~3일은 예사였다. 70년대 초, 상주에서 경주로 명주수의를 팔러 가면 그 정도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떠나기 전 언제 돌아올지 알려줬다. 나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엄마를 기다렸다. 외동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 그런지 어릴 때부터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책장을 넘기다가도 문득 사고가 난 건 아닌 지, 다치진 않았는지, 혹여 돌아오지 못하시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나서 심장 이 두근거렸다.

“그럴 일이 좀 있었다.”

어머니는 옷을 툴툴 털면서 별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늘 그랬다. 어머니는 좀 체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머니가 넋두리를 하거나 눈물을 훔치는 걸 본 기억 이 없었다. 언제나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날도 내가 몇 번이나 채근하자 이틀이나 늦은 이유를 고백했다.

“연탄가스를 마셨다. 죽다가 살았다.”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지만,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 밀린 설거지를 했다. 나는 밤새 잠을 못 이뤘다. 집에 돌아와 마음이 편해 그런지 낮게 코를 골았던 어머니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머니의 팔을 부여잡고 밤을 새다시피 했다. 새처럼 여린 나와 달리 어머니는 여장부였다. 우선 키가 컸다. 163cm으로 당시로선 웬만한 남자만큼이나 큰 키였다. 거기다 통뼈에다 체격도 당당해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감이었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당신을 닮길 원하셨던 듯하다. 내게 늘 독립심과 정직을 가르쳤다. 습관처럼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당부했다. 그 말씀들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머니가 당신이 하신 말씀 그대로 사셨기 때문이었다. 연탄가스에 취해서 영영 집으로 돌아 오지 못할뻔한 얼마 후에도 다시 길을 나섰다. 껌딱지 딸과 함께 당당하게, 또 정직하게 살아내려고 굳세게 하루하루를 버텨낸 거였다.

어머니는 이제 호호 할머니가 되었다. 요양원에서도 ‘선배님’ 축에 속한다. 뼈만 앙상한 어머니의 팔목을 보면서 ‘사모곡’이라 는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을 때가 많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자나 깨나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바로 내 어머니의 모습 이다. 하루 종일 어머니 곁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결혼한지 40년 다 되어 가고 딸 셋 모두 장성했지만 나는 그때 그 시절처럼 아직도 엄마의 껌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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