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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버지’의 마음에서 배우는 용기와 희망

발행인 칼럼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 입력 2018.09.30 00:00
  • 수정 2020.11.17 14:21
  • 기자명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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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야구의 나라다.”
2002년 히딩크가 했던 말입니다.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서도 스포츠 신문 1면에 야구 기사만 잔뜩 실리는 걸 보고 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가장 관심이 가는 종목이 야구입니다. 한국이 강력한 우승후보입니다. 대만도 여간한 전력이 아니어서 역시 후보입니다. 다만 ‘준우승 후보’로 평가하는 분위기입니다.

한국 야구의 아버지가 국외 추방당한 사연
‘한국 야구의 아버지’는 질레트(Phillip L. Gillette, 1872 ~ 1938)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1904년에 야구를 보급할 즈음 이를 백안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철없이 공 던지면서 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구뿐 아니라 스포츠 경기 자체를 ‘밥지랄한다’고 하기 일쑤였고, 운동선수들을 '운동꾼', '놀음꾼'이라고 불렸습니다.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황성 YMCA 야구단의 실력이 급성장한 후였습니다. 황성 팀이 조선에 있던 일본팀과 미국인 선교사 팀을 물리치자 야구가 민족의 설움과 울분을 터뜨리는 장이 되었습니다. 야구에서 어떤 정신적 의미를 찾았던 것입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야구 역시 단순한 운동을 넘어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노인과 바다’에는 야구와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가 중요한 인물로 언급이 됩니다. ‘노인과 바다’는 세계 대전 이후 실패와 좌절감에 절망에 휩싸인 세계에 대해 인간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할까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조 디마지오가 보여준 열정과 불굴의 정신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 것
입니다. 헤밍웨이처럼, 야구는 분명 어떤 정신적인 가치와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질레트도 야구를 통해 청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으려 애썼습니다. 그는 조선인만큼이나 조선의 사정을 잘 알았고 또 안타까워했습니다. 그가 조선을 떠나게 된 계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1911년, 일본은 조선의 민족운동을 탄압하려고 ‘조선인들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시도했다’고 조작해서 선각자들을 대거 체포했습니다. 이른바 105인 사건입니다. 질레트는 이를 바깥 세상에 알리려다 발각이 되어서 중국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야구를 통해 ‘희생’의 의미를 배우는 라오스 청소년들
1904년으로부터 이제 꼭 114년이 지났습니다. 100여 년 전 우리 할아버지들이 야구에게 처음 가르쳤던 그분처럼, 우리나라에도 외국에 나가서 스포츠를 전파하는 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이만수 전 SK 감독이 있습니다. 4년 전부터 라오스에 가서 야구를 전파했습니다. 
라오스인들도 처음에는 우리 할아버지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밥지랄’이라고 했죠. 라오스에서도 야구로 밥 먹고 살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만수 전 감독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희생번트’를 가르칠 때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희생번트는 타자가 자기를 희생해 출루해 있는 주자를 한 단계 앞으로 내보내는 거죠. 라오스 청소년들에게 희생번트를 가르쳤더니 도무지 이해를 못하더랍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왜 희생해야 하죠?”라고 반응했다고 합니다. 라오스의 젊은이들이 야구를 통해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정신을 배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라오스 선수단은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1승을 노렸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최초의 국제대회 출전’에 의미를 두었지만 대회 직전에 조금 달라졌습니다. 라오스에 수해가 덮치면서 아시안 게임 1승으로 상처 입는 라오스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태국과의 첫 경기에는 6회에 0-15로 콜드게임 패를 했습니다. 다음날 열린 스
리랑카와의 경기에는 훨씬 좋아진 모습을 보였지만 결과는 10-15패였습니다. 선수들은 하나 같이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져서 억울하기보다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답답하고 국민들에게 미안했을 것입니다.
실망할 법도 하지만 이 전 감독은 오히려 너무 잘해서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는 선수들에게 “너희는 정말 대단한 거다. 나는 처음에 야구 할 때 공 3개를 보고 그냥 들어왔다”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태국전만 하더라도 6회까지 끌고 갔다는 것 자체가 대견하다고 했습니다. 관계자에 따르면 라오스엔 제대로 된 야구장이 없어서 넓은 공간이 훈련도 해보지 못했고, 야구장에서 제대로 경기를 한 것도 (태국전까지) 두 번째였습니다. 
이 전 감독이 진정으로 칭찬하는 부분은 야구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야구를 통해 꿈을 가졌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누누이 “꿈이 없던 선수들이 지금은 다 변했다. (전처럼) 하루 세 끼 밥 먹는 게 꿈이 아니라, 야구를 갖고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루어질 꿈이 있고, 꿈을 향해 분투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입니다.


질레트의 염원, 이만수의 소원
이 전 감독의 말이 마음을 파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늘 성과에만 매달려왔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지만 지나치게 성급해서 일을 그르친 적도 많았습니다. 
이 전 감독의 말대로 최선을 다했다면, 최선의 흔적이 보일 만큼 애쓰고 노력했다면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없지만, 생각만큼 빨리 이루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일신우일신 꾸준히 나아지는 것만 해도 분명 가치 있는 성과입니다.
라오스에는 라오스의 숙제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숙제가 있지만, 이를 이루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 감독이 라오스 선수들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해보고 ‘나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처럼 우리 역시 1승이 목표인 선수들에게 배울 점이 있습니다.
이 전 감독의 말대로 라오스 야구는 이제 시작입니다. 그 마음가짐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1년 후에는 더 나아질 것입니다. 이 전 감독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오스 청년들과 함께한 마음과 소망은 반드시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13년, ‘한국 야구의 아버지’는 염원만 남기고 나라 밖으로 쫓겨났지만, 조선인들과 한 마음으로 소망했던 해방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만수의 소망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두 ‘아버지’의 마음에서 굴하지 않는 용기와 희망의 의미를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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