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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교동시장에서 탄생한 굳센 금순이

대구 10가, 대구의 노래를 찾아서

  • 입력 2018.09.28 00:00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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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금순아’의 진짜 배경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에 '흥남부두', '일사(1·4 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이지만 원래 배경은 대구의 ‘교동시장’이다. 다만 여러 사정 때문에 부산과 국제시장을 배경으로 잡았을 뿐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51년 여름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강사랑, 가수 현인이 교동시장 내 강산면옥에서 냉면을 먹고 나오던 중 즉석에서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녹음도 대구 중구 화전동에 자리 잡고 있던 오리엔트 레코드에서 진행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추억하는 교동시장의 풍경은 영화 ‘국제시장’과 싱크로율 100%다. 교동시장의 원래 이름은 양키시장이었다. 피난민들이 꾸러미 속에서 꺼낸 물건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 및 ‘음식’ 등을 가져와서 시장을 형성했다. 요컨대, 시장의 이름과 탄생 배경, 파는 품목 등 국제시장과 비슷하다.


굳이 ‘시장’을 배경으로 한 이유
새벽시장에 가보면 상인들이 흥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의지를 배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실은 그 이상이다. ‘열심’을 넘어 ‘악착’이 보편화 된 곳이 시장이다.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시장을 억제했다. 무엇보다 농민들이 농사에 충실하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시기는 허락했다. 바로 전쟁이나 가뭄 같은 자연 재해로 먹고 살기가 팍팍해졌을 때였다. 물물교환으로 어려운 시기를 근근이 이겨나가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 성종 임금 때 김종직이 “흉년에는 장문이 구황에 유익하므로 폐할 수 없으나, 금년은 비가 흡족하게 내려서 풍년들 조짐이 있으니...” 라는 말을 남겼다.
국제시장이나 교동시장 모두 피난 보따리를 풀어서 형성한 시장이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들처럼 대구 ‘양키시장’에도 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많았다. 그래서 쓰는 말도 대구 말도 아니고 북한 사투리도 아닌 어중간한 말투였다. 시장은 시대의 비참함과 그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불꽃처럼 튀기는 곳이었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왜 흥겨운 가락일까
그런데 ‘굳세어라 금순아’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가사와 노랫가락의 부조화다. 가사는 실향민의 아픔과 기원을 토로한 절절한 내용인데 노랫가락은 경쾌하고 구성집니다. 구슬픈 가사, 신나는 노랫가락, 이 언밸랜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일단, 시장이 가지는 처절함과 의욕의 공존, 그것을 드러내는 음악적 장치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 하나는 3절에 드러난 희망적인 내용 즉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너와 나 사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며 ‘남북통일이 되면 재회하여 함께 춤을 추자는 내용’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지막 해석은 어렵고 힘든 시기를 극복해가는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정서가 은연중에 드러난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일제강점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중에는 ‘가락’이 있었다. 물론 많은 음악인들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유지를 했지만, 그럼에도 일제는 교묘하게 우리 민족이 우리 스스로를 잊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그들은 조선을 여성적인 국가로 인식시키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조선 하면 기생을 연상시키도록 이미지 조작을 시도했다. 나약하고, 의지적이고, 우리가 중국 등 강대국에 빌붙어 살아온 독립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민족이라고 가르쳤다. 우리 건축물에 곡선이 많은 것을 두고도 슬픔이 많아서 그렇다고 해석했다. 결정적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한’ 혹은 깊은 슬픔이라고 주장했다.


심청이는 ‘신나게’ 울었다
우리 음악에 담긴 주된 정서는 ‘한’이 아이다. 물론 깊은 슬픔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끝끝내 그것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명창 이동백은 우리 민요와 판소리 등이 너무 슬픈 가락을 많이 띄는 것은 안타까워했다. 아마도 우리 민족만의 기백이나 흥이 잦아드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국악의 장단 중에 중중모리가 있다. 조금 빠른 장단이다. 예를 들어서 ‘심청가에서 모든 맹인들이 눈을 뜨고 좋아서 춤추는 장면’ 등과 같이 주로 기뻐서 흥겹게 춤추는 노는 장면이나 ‘놀부가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러 돌아다니는 장면’과 같이 씩씩하면서 경박한 느낌을 주는 대목이 그렇다. 그런데, 이 중중모리가 의외의 대목에서도 쓰인다. ‘심청이 임당수로 가게 된 것을 안 심봉사가 통곡하는 대목’ 이 대표적이다. 통곡하는 데 많이 활용된다. 이를테면, 슬픔이 극한이 이르는 대목에서도 중중모리 장단에 올라탄다. 조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빠른 장단으로 흥을 돋우는 것이다. 더 슬퍼할 수 있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슬픔을 밖으로 토해낼 수 있도록.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고, 슬픔은 씻긴다. 독특한 슬픔 해소법이다.


금순이가 힘들어도 굳세었던 이유 
조금 과잉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장단도 우리 민족 특유의 낙천성이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 성정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일제강점기의 노래는 조금 축 처지는 분위기다. - ‘기미가요’ 빼고. 이를테면, ‘목포의 눈물’이나 ‘비 내리는 고모령’은 정말 구슬프다. 힘들었기 때문이다. 6.25도 일제강점기도 못잖게 고통스러웠지만, 두 시대는 차이가 있다. 결이 다르다. 일제강점기는 정체성마저 부인되던 세월이었다. 징용에 끌려가서 죽으면 일본군으로서 죽는 거였다. 심한 경우는 야스쿠니에 합사되기도 했다. 
반면 6.25는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우리’가 겪는 고통이었다. 타인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으로 감내한 고난이었기에 한국인다운 의지와 낙천성이 노랫가락에 스며든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이렇게 힘들지만 어쨌든 우리 일이다. 징용처럼 남의 전쟁에 가서 총알받이가 되지는 않지 않느냐. 지금 우리 이름으로 우리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인답게 헤쳐가자.’이런 암묵적 동의가 노랫가락 속에 녹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금순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우리는 굳세게 또 낙천적으로 살아왔다. ‘국제시장’의 ‘고모님’은 무슨 노래가 나오든 춤부터 춘다. 망나니 남편과 살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사람이었지만 오장육부에 ‘흥주머니’가 하나 더 붙은 사람처럼 음악만 들리면 몸부터 흔들고 봤다. 조금은 바보스러워 보이는 그런 낙천성이 없었다면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굳세어라 금순아’는 일종의 예언가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굳건하게 버티면서 결국 극복해 내고야 말 것이라는 예언.
6.25 이후 수십 년은 한반도 역사상 이래 가장 힘든 시기였다. 우리는 한민족답게 신바람과 흥으로 이겨냈다. 
요즘 ‘한류’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한류, 하면 한국 가요와 드라마 제목이 줄줄이 따라붙지만 한류의 실체는 한국 사람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흥 많고 굳센 민족이 또 있을까.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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