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아침은 삶을 디자인하는 시간이다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18.09.06 00:00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늦게 잠자리에 드는 남편을 따라 한참을 그렇게 지냈다. 수년에 걸쳐 차츰차츰 일찍 일어나게 되더니, 어느새 나는 아침형인간이 되었다. 남편이 시키지도 않았고, 내가 묻지도 않았으면서도, 나 혼자 그가 원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맞추며 살았던 방식들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내 생각대로 내 방식대로 산다고 해도, 우리 가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도. 충분히 잠을 자고나면 저절로 눈이 뜨인다. 맨 먼저 이를 닦고, 물을 끓여 홍차를 우린다. 

영국에서도 아침마다 홍차를 마시는데, 이상하게도 영국에서 마시는 홍차는 더 맛있다. 홍차를 곁에 두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기도 하는데, 요즘은 필사하는 재미가 늘었다. 일어나자마자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지만, 습관이 된 몸과 정신은 쉽게 그런 모드로 바뀐다.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맞으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을 시작한다. 아무 방해 없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다.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하루를 잘산 것 같은 안정감이 든다. 작은 일이지만 오래 지속되어 몸에 붙으니, 심지어 내 삶은 아침시간이 모여서 된 것 같은 생각까지 든다. 내 시간과 내 하루가 내 손안에 있는 느낌이 들면서, 이런 시간이 많아지고 길어지면 내 인생이 내 손안에 잡힐 것도 같다. 

필사하는 즐거움은 옥스퍼드의 오래된 필기구 가게에서 비롯됐다. “이런 것에 이렇게나 정성을 들였나?”할 만큼, 멋진 구식 필기구들이 많이 있었다. 노트, 카드, 만년필, 펜, 펜촉, 책갈피 등 고풍스럽고 예쁜 것들이 많았다.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불로 녹여 편지를 봉하는 빨강색 실링과 깃털달린 펜은 클래식했다. 펜촉은 모양도 다양한데, ‘30년대 영국체’, ‘40년대 프랑스체’ 같은 시대별 트렌드가 있는 것도 신기했다. “뭐, 이런 것까지 필요할까?”하는 망설임 후에, 마침내 펜대와 펜촉을 샀다. 깃털까지는 없어도 상큼하고 밝은 주황색 나무 펜대로. 

펜촉 끝에 잉크를 찍어 책에서 읽은 글귀를 공책에 옮긴다. “스극스극”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경쾌하게 내 귀를 집중시킨다. 잉크가 천천히 펜촉을 따라가며 글씨가 되는 행위는 럭셔리하다. 힘이 들어가지 않고 미끄러지듯 쓱쓱 가볍게 써지는 것은 의외다. 잉크를 많이 혹은 조금 찍을 때가 다른데, 농도에 따라 글씨가 진하거나 옅어지는 맛이 있다. 적당하게 잉크를 수용하면서 반듯한 글씨로 완성시키는 종이와 잉크를 너무 많이 흡수하여 “퍽”하고 퍼져 글씨를 뭉그러뜨리는 종이가 있는데, 만년필과 볼펜보다 종이를 까다롭게 받아들이는 옛날식 펜의 태도 역시 맛이라고 봐야한다.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쓸 때보다 손놀림은 가벼우면서도, 만년필의 중후함과 볼펜의 홀가분함 모두를 느낄 수 있다. 손을 움직여 써나가는 손맛과 눈으로 읽는 맛, 그리고 글씨가 귀로도 들리는 맛은 글 쓰는 이와 글이 나누는 미묘한 소통 같다. 눈으로 읽은 글을 손이 옮기고, 귀가 들어, 쓰는 이의 머릿속에 전달하는 맛이랄까?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아침시간을 보내는 모습에
서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고나 할까요? 지금까지 ‘아침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대해 인터뷰
를 한 적도 몇 번 있습니다. 그만큼 아침을 맞이하는 모습이 다양하기 때문이겠죠. 제 경우에
는 보통 아침에 거의 같은 일을 하거나 정해진 일밖에 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한 
마디로 저에게 아침은 변칙적인 일을 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아침이라는 
시간이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의 아침에 대해 취재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되고
요.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것마저도 아침의 습관일 테니까요.’ 

- 와타나베 유코, ‘집의 즐거움’

이 책의 저자는 아침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사람을 옷차림이 세련된 사람만큼 멋지게 여긴
다고도 하고, 멋진 여성은 분명 아침시간도 근사하게 보낼 거라고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더 
단순하고 더 일정하게 살고 싶어지더니, 내 아침시간이 일정해졌다. 나만의 아침시간을 가졌
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아 벅차기까지 하다. 매일 아침,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
면서 삶을 디자인하는 중이다.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