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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나무 우는 새벽의 ‘일체유심조’

길의 참맛, 지방도 (6) 안동시 임동면 해천마을

  • 입력 2018.09.02 00:00
  • 수정 2020.11.16 15:11
  • 기자명 김윤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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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나무가 울었다. 두름산 자락 안동시 임동면 대곡리 해천마을. 설을 며칠 앞둔 2009년 1
월 하순이었다. 뜨르르르르르르…. 사시나무 떨리듯 떠는 소리가 새벽의 어둠과 정적을 깼다.
천영수(60) 당시 이장의 귀에도 예사롭지 않은 소리였다. 같은 시각 동암사 애영 스님도 새
벽 예불을 시작하려고 마당으로 나오다 이 소리를 들었다. 새벽잠이 없거나 잠귀 밝은 마을 사
람들도 이 소리에 잠을 설쳤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들어왔다. 오래 들어와서 익숙하기는 하지만 편안히 들
리지는 않는 소리. 나무 둥치가 울리는 것 같기도 했고 다급하게 마음을 재촉하는 것 같기도 했
다. 깜깜하고 적막한 한겨울 산골 새벽에 소리는 너무 또렷해서 되레 불안했다. 

나무가 우는 소리…묵계처럼 이어온 ‘토템 서사’
마을 어르신들은 그것을 나무가 우는 소리라고 했다. 나무와 소리는 마을에서 전해져 오는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높고 외진 산자락 동네여서 묵계처럼 이어올 수 있었던 토템 서사였다. 고인이 
된 그 이전 이장 김두현 어르신도 입버릇처럼 ‘나무가 참 이상하다’고 말했다.

소리가 난 곳은 마을에서 직선 거리 100m 남짓한 떡갈나무. 수령 500년의 안동시 지정 보호수다. 2009년 2월 측정한 나무 높이는 16m, 사람 가슴 높이 밑동 둘레는 4.6m다. 뒷산을 오르는 길가 오
른쪽 축대 위에 길을 거느리며 서 있다. 20여 호가 모여 사는 마을 곁 북서쪽을 수문장처럼 지킨다.

“나무가 울면 으레 큰비가 왔다느니, 이웃 간에 싸움이 나거나 아픈 사람이 생겼다느니, 초상 치르는 일도 있었다느니 하고 일부 언론에 보도됐지만 억측이거나 과장된 얘깁니다. 어쨌든 이런 일을 겪
으며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레 나무에 경외심 같은 것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권상기(65) 이장은 조심스레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나무 주변을 해마다 벌초하고, 임동면사무소에서는 나무 앞 오가는 길을 정기적으로 정비한다.

해천마을은 임하댐 상류 끝에서 7~8km를 거슬러 올라 가파른 산길을 다시 1.5km쯤 더 올라야 닿는다.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하늘 아래 첫 동네다. 고지대에 있지만 계곡이 깊고 땅이 비옥한 편이라 밭농사가 잘 된다. 주변 산의 나무들도 세력이 좋다. 농사는 사과밭, 배밭, 고추밭, 담배밭 순으로 많다. 사과밭과 배밭 곳곳에는 지하수 스프링클러가 돌아간다.


새 박사가 이끄는 조사팀까지 
2009년의 나무 소리 역시 으레 그랬듯이 마을 사람들을 얼마간 삼가거나 근신하게 하고는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이번에는 민원이 접수됐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된 것. 천 이장이 면에 직접 민원을 
넣었다는 얘기와 동암사 스님의 전화 통화 중에 본의 아니게 민원이 접수됐다는 얘기가 엇갈린다. 어쨌든 나무 울음소리의 진위를 밝히고 혹시나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막아달라는 취지의 민원이었다.

다음날 임동면장과 담당 직원들이 마을을 찾아 나무를 둘러본 뒤 자체 조사가 시작됐다. 며칠 뒤 이 민원이 알려져 ‘500년 된 임동 떡갈나무 울었다’는 등의 일부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우는 나무 이야
기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 덕분에 인적 드문 산골마을에 나무를 보러 오는 외지 사람이 심심찮게 이어졌다. 

2월 초에는 시의 초빙으로 윤무부(경희대 생물학과) 명예교수가 이끄는 조사팀이 마을에 도착했다. “교수님 한 분과 학생들(대학원생) 4명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산골마을이라 숙박할 데가 없어서 우
리 절에서 묵었는데 여러 가지 장비하며 짐이 많았어요. 밤에는 교대로 나무 부근에 텐트를 치고 밤새도록 관찰을 하더라고요.” 애영 스님의 얘기다. ‘새 박사’인 윤 교수를 초빙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조사의 결론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2박3일 간의 조사 결과는 사람들의 큰 관심에 비한다면 좀 싱거웠다. 의문의 소리는 딱따구리가 이 나무의 썩은 둥치에 구멍을 파는 소리였다는 것. 나무가 운다고 잇따라 보도했던 언론들은 이 조사 결과는 아무도 보도하지 않았다.


신비의 빛깔 벗은 고목의 이야기
나무가 우는 것이 아니었고 그러므로 나무가 운다고 궂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결론은 단순 명쾌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왜 이 단순한 사실을 몰랐을까. 마을 사람 중에 그 소리가 딱따구리 소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을까. 

마을 주민 김동석(68) 씨는 산골마을 사람들 특유의 생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전부터 어르신들이 나무가 운다고 하니까 다들 그대로 여긴 겁니다. 딱따구리 소리와는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한 거죠. 딱따구리 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무가 운다는 생각을 아예 부인하지는 못합니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조금은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얘기가 바깥에 알려지고 새 박사인 분이 와서 딱따구리 소리라고 한 겁니다. 생각해 보니 굳이 아니라고 할 근거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조사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런데 요새도 가끔은 나무 밑에 누가 막걸리 병을 갖다 놔요.”

결국 나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외심도 근거 없는 것이 됐다. 이 나무가 ‘사람의 이해력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지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믿음은 이 나무가 ‘사람의 이해력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지력’을 가져 달라는 바람일 수도 있다. 얼마간 신비의 빛깔을 띤 고목의 전설이 깨지고 나면 나무는 사람들에게 그저 목재나 땔감으로만 보이게 될까. 

산골 마을의 느티나무 노거수 숲
해천마을은 큰 나무 마을이다. 500년 된 떡갈나무 지척에 해천마루 고개가 있다. 북동쪽으로 직선 거리 150m. 이 고갯길 양편으로 고대 원시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느티나무 일곱 그루가 무리지어 서 있다. 숲 가운데 길은 숲그늘에 덮였다. 숲이 짙으니 그늘도 짙다. 이곳을 처음 찾은 사람은 이런 산골 마을에 아름드리 노거수가 무리지어 있다는 데 놀란다. 범상치 않은 숲의 외관은 높고 우람하다.

“옛날에는 이 숲이 동네 휴식 공원이자 마을회관이었습니다. 남녀노소가 다 여기서 놀았어요. 숲 나무에 그네 두 대를 걸었습니다. 오른쪽 여성상 나무에 맨 그네는 여성 전용, 왼쪽 남성상 나무에 맨 그네는 남성 전용이었어요. 앞으로 우뚝 튀어나온 나무여서 남성상, 나무둥치가 둘로 갈래져서 여성상 나무라고 한 거죠.”

“더운 여름철에는 마을 피서지였어요. 에어컨도 선풍기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여기 그늘에 앉거나 누워 있으면 에어컨 저리 가라죠. 떡도 가져오기도 하고 술도 가져오기도 해서 새참거리를 나누며 얘기꽃을 피웠죠.” 권상기 이장의 설명이다. 

가장 큰 나무 아래 세워진 보호수 지정 안내 비석에는 수령 400년 이상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권 이장은 700년 이상일 거라고 했다. 원래 아홉 그루였는데 남성상 나무를 포함해 두 그루는 고사했다. 지금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어르신들께 들은 바로는 옛날 장씨라는 분이 이 숲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합니다. 이 분이 보기에 장차 지겟가지(지겟작대기) 하기에 딱 좋은 나무가 있어 그 나무를 잘 키우려고 이 숲을 보살피고 관리했는데 어느 날 나무들이 엄청스레 자라면서 숲이 됐다고 해요.”

왼새끼처럼 꼬인 소나무 천혜당
권상기 이장과 작별하고 동암사 옆 천혜당 나무를 찾아 가려는데 스님이 나와 말린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갈 수 없단다.

“천혜당은 옛날에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낸 곳이라고 합니다. 천혜당은 건물 이름이 아니고 소나무 이름이에요. 아기를 낳은 집 대문이나 사람 출입을 금하려는 곳에 치는 새끼(금줄)를 여기서는 ‘금삭’이라고 합니다. 금삭은 왼쪽으로 꼰 새끼(왼새끼)죠. 왼새끼는 신성한 곳을 표시하고 부정한 사람의 접근이나 잡귀의 침범을 막는 위해 경계를 알려줍니다. 천혜당이라는 소나무는 왼새끼처럼 왼쪽으로 꼬여 있어 나무의 외관부터 특이하고 신령스러워요.” 좀 전에 권상기 이장으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왼쪽으로 꼬인 천혜당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왔다고 해요. 저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29년 생활하다가 귀향한 지 30년 됩니다. 그동안 딱 한 번 제관이 돼서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천혜당에서요. 기우제를 지내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데 신기하게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산골 마을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시간을 자꾸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제관을 뽑는 조건을 듣다보면 50년은 더 거슬러 올라 간 것 같다. 천혜당을 안내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한 애영 스님은 한 가지를 더 알려준다.

스님에게 떡갈나무 울음소리 얘기야말로 일체유심조 화두를 통째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여쭤보려다 그만두었다. 물음 속에 답이 있는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묻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교만함이다.


폭염은 저만치…다음 발길을 옮기며
“천혜당 부근에 윷판등이 있어요. 널찍한 바위인데 윷판 비슷한 것을 새겨놓은 거예요. 신선들이 윷놀이하다가 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죠. 재작년 겨울인가 암각화 연구팀이 와서 사진도 찍고 자로 재고 조사를 해갔어요. 겨울에 가면 천혜당과 함께 윷판등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스님은 다음을 기약한다.

산자락 두메 마을에서 500년 된 떡갈나무의 울음소리에 얽힌 얘기를 들었고 원시림 같은 느티나무 노거수 숲을 둘러봤다. 이어서 천혜당이라는 소나무와 윷판등 얘기까지 듣고 나자 전설의 고향을 한 바퀴 돌고 온 듯 폭염이 저만치 물러간다. 이 산골 마을에서는 주변의 풍광만으로도 더위를 씻는다. 지방도를 따라, 주변 얘기와 숨겨놓은 풍광을 따라 갈길 먼 발길을 또 옮긴다. 

 

김윤곤 기자 seou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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