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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의 전쟁... 나훈아가 전하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는?

발행인 칼럼

  • 입력 2020.09.27 00:00
  • 기자명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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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가 추석특집으로 대중을 찾아옵니다. 공연은 이미 재개했지만, 방송을 통해 팬들을 만나는 것은 14년 만의 일입니다. 2005년 9월에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방영 된 '나훈아의 아리수'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방송 출연 취지를 바이러스와의 사투에 지 친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국민을 울리고 웃기는 가수답습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내린 정확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가요계의 코드는 위로와 공감, 그리고 추억인 듯합니다. 미스트 트롯 출신 가 수들이 전화로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인기가 폭발적입 니다. 수화기 너머로 갖가지 사연이 쇄도하고 이 사연을 깔고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 도 노래지만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추억을 소환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모든 노래가 ‘멍게’라고 생각합니다. 멍게는 동물로 태어나지만 정착할 데를 찾으면 뿌리를 내리고 식물처럼 살아갑니다. 유행가도 처음엔 성큼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을 부유할뿐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부지불식 중에 우리 마음에 착 달리부터 깊 은 뿌리를 내립니다. 노래가 사람의 강렬하게 마음을 흔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 을까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미스트 트롯 참가자들이 비단 트롯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 다.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트롯이 다른 장르의 노래까지 집어삼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과거 에도 예전에 나온 노래는 곧 트롯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시계를 일제강점 기 즈음으로 돌려보자면,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미국의 음악이 대거 들어옵니다. 소위 미8군 무대를 통해 미국 본토의 음악에 소개되고 많은 뮤지션들이 탄생했습니다. 그 러다 1960년대에 들어 향수에 젖은 팬들이 다시 옛노래 혹은 옛날 스타일의 노래를 찾으면서 트롯을 대표하는 이미자, 남진, 나훈아 같은 가수들이 등장했습니다. 옛날 노래는 무조건 트롯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노래들이 트롯의 범주에 걸쳐지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인의 노래에는 한국적인 창법이 스미기 마련입니다. 송가인씨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트롯에는 판소리의 창법과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심지어 락커에게서도 ‘뽕끼’가 느 껴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조항조는 락커였지만 트롯 가수로 전향했습니 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락커스럽다고 느끼는 젊은 층은 거의 없습니다.

트롯은 가장 익숙한 창법을 구현합니다.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듣기만 해도 흥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음악가는 대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에 전문가입니다. 대중의 마음을 잘 압니다. 늘 무대에 서면서 대중과 호흡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 시대 김성기라는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권력자이자 간신이었 던 목호룡(1684-1724)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와서 연주를 하라는 ‘명령’이었 습니다. 김성기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목호룡이 “죽이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는 굽 히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조선 천지에 알려졌고, 선비들은 목호룡을 칭송했습니다. 목호룡이 임금에게 거짓된 내용을 고해서 억울하게 죽은 선비가 60여명에 이릅니다. 훗날 처벌을 받았으나 아무도 감히 그에게 큰 목소리를 못 내고 있던 때라 김성기의 과감한 ‘반항’은 선비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했던 듯합니다.

민요와 판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춘향전은 최초의 미투였습니다. 춘향의 부르짖 음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여성으로서 자존감을 지킬 자격이 있다”는 호소입니다. 기 생의 딸이니까, 절반의 양반이니까 온전한 여성으로 대접받을 생각하지 마라는 사회 적 통념에 대한 반발입니다. 당시 춘향가를 듣던 여인들은 속이 시원했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춘향가에 깊은 공감을 느꼈던 듯합니다. 이런 기록이 전합니다. 1939년 에 조선 악극단이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당시는 전쟁이 한창이었던 때라 무 대에서 일본 군가 따위나 부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규수 지방에서 공연할 때 객석에서 조선 노래를 불러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습니다. 단원 중 한명이 춘향전의 일부를 불 렀는데, 이 공연이 뜻밖의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은 완고한 신분제 사회였 던 만큼 춘향의 노래에 느끼는 바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나훈아는 ‘위안’과 ‘공감’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60~70년대는 고향 을 떠나 도회로 나와서 공장에 들어가 일하던 청소년들이 많았습니다. 명절 때나 집 에 다녀올 수 있는 청소년들에게 ‘고향역’의 가사는 절절하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습 니다. ‘고향역’은 그렇게 한 시대의 마음을 훔친 노래가 되었습니다. (나훈아는 지금도 활발하게 신곡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 혹은 위로를 음악에 적극 적으로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가수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창법으로 노래하는, 가장 평범한 말로, 또 살가운 멜로디로 한 시대 의 슬픔을 어루만진 가수가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을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너무 좋 은 일입니다. 비단 나훈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음악인들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자신의 본분을 감당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새삼 희망을 발견합니다.

대구는 지난 3월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다시피 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모든 시민 이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잘 이겨내 지금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모범 방역 도시로 우뚝 섰습니다. 바이러스와 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백신이 나오기 전 까지 우리를 지키는 건 우리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이 전 쟁을 잘 치루어 나가길 소망합니다. 언젠가 나훈아의 노래 제목처럼 ‘건배’를 외칠 날 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지치지 말고 하루 하루 잘 견디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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