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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책소개

  • 입력 2020.08.16 00:00
  • 수정 2020.11.13 15:33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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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는 증거가 나오면 다 태워버린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장에서 나온 말이다. 기록은 강력한 증거인 만큼 권력자가 옹고집일 경우 불편한 내용이 담겨 있으면 무시하거나 구석에 처박아두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도 태워버리고 싶은 증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조작된 증거, 혹은 기록일 경우다.

구한말에 이 나라에 왔던 선교사 노블 여사의 1906년 일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몇몇 집들은 일본 군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집세랍시고 돈을 지불하기는 하지만, 말이 좋아 집세지 받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너무 적은 액수다. 대개의 경우는 집 주인 들이 그런 보잘것없는 액수를 받기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군의 문서에는 집세를 지불하고 집에 거주했다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액수라든가, 집주인이 그것 받고는 못 빌려주겠다고 거부했다는 기록도 함께 썼을까. 그런 기록을 남길 정도의 양심이었다면 애당초 남의 집을 헐값에 빌릴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19년 3월부터 힘든 상황이 본격화되었다. 3월31일이 한 남자가 남대문에서 기차를 내려 걸어가다가 일본인들에게 맞아서 죽었다. 재향 군인들이었다. 때린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기록에 뭐라고 적었을까. 그 조선인이 행인을 위협했다고 했을까. 아니면 사실 남의 집 담을 넘으려는 도둑이라고 했을까.

‘조선인이 달리는 차에 돌을 던졌다.’

어떤 기록에는 저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사실은 조선 옷을 입은 일본인들이었다. 한국인들이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국인들도 살해 위협을 받았다. 재향 군인들이 조선 옷을 입고 미국인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조선인의 배후에서 ‘운동’을 조종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만약 계획을 실행했다면 이렇게 기록했을 것이다. ‘난폭한 조선인들이 미국인들을 살해했다.’

조선의 밤거리는 위험한 공간으로 돌변했다. 야만과 가난의 땅에 문명과 번영을 전하기 위해 건너온 일본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폭력도 문명과 번영을 위해서 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 대단히 역설적인 현상이었다.

노먼 여사는 제암리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직접 목격한 이들의 목소리를 일기장에 담았다. 레이몬드 커티스 부영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A.W. 테일러 등은 재가 된 제암리 교회와 숯덩이가 된 시신들을 목격했다. 인근 다섯 마을도 상황이 비슷했다.

정동교회 여신도 중의 한 사람은 아버지 집을 방문하려고 그 지역으로 내려갔다가 아홉 개의 마을이 동시에 불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록. 외국인들은 일본군의 폭력과 이에 억눌린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일본군은 어떻게 기록했을까. 다른 기록은 차치하고 그 지역 사람들의 ‘ 죽음’을 이렇게 기록했다.

‘매장을 인가받고자 할 경우 그들은 서명을 해야 했는데, 만일 그들 이 자상이나 총상이라고 적으면 승인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매장에 대한 인가를 받기 위해 ‘자연사’라고 써야 했다.’ 그들의 기록을 그대로 믿지만 3.1으로 제암이라 인근 마을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사’를 했다. 미국인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쳤다. 일본은 이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그들은 이에 관한 기사를 썼다. 제목이 ‘그럴 만했다, 미국 의 불한당들’이었다. 이런 식의 중상은 신문에 종종 실렸다. 당시 기 사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자면 미국인들은 불한당이었다. 한 구절만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저급하고 무지한 미국의 선교사들’ 1919년 3월 14일 일기에 또 다른 ‘기록’이 등장한다. 감리교 감독 인 해리스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의 치하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면 이전보다 오히려 나아진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서류를 들고 평화회의 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외국인들은 해리스의 견해에 적잖게 실망 했다. 뜻밖에도 이에 동의한다는 서명한 인물 중에는 배재학당의 신흥우 학당장이 있 었다. 많은 이들이 분노했지만 학당장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참고로 해리스는 30년 간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고,1898년 일본 천황에게 ‘서 옥장’ 4등 훈장을, 1905년엔 3등 훈장을 받았다.) - 1919년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일본인들은 아마 해리스의 서류를 들고 나올 것이다. 다만, 만지지도 못하게 하지 않을까. 그들로서는 너무도 희귀하고 소중한 문서일 테니까. 참고> 메티 윌콘스 노블, <노블일지 1892-1934>, 강선미 이양준 옮김, 이마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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