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팔도의 풍물 명인 찾아 인고의 30년 공부 결실

도전에 산다

  • 입력 2020.07.20 00:00
  • 수정 2020.11.13 14:03
  • 기자명 진선화 시민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부포놀음 전수조교' 꿈을 이루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만큼 고색창연한 이끼가 앉은 말. 아마도 다음 세대쯤에는 사어 목록 맨 앞자리에 놓일 말. 젊은 사람들은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큰 짐을 지운 유교 잔재라고 손사래 칠 말. ‘봉제사 접빈객’이란 말이 있어 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다. 스물넷에 시집와서 4대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일 년에 열 번 제사를 모셨다. 가업이던 집옆 식품회사 공장 식구들의 점심과 참을 차렸으며, 집에는 날마다 손님치레 점심상을 차렸다. 7년 치매를 앓으신 시할머니를 수발했고, 얼떨결에 스물아홉 새댁이 효부상을 받았다. 이런 나의 삶을 설명하는데 ‘봉제사 접빈객’만한 말이 없어서다.

남편은 말수가 적지만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어렵게 자란 시절을 늘 잊지 않아서 주변에 배고프거나 몸 편치 않은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 못했다. 근동까지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거르는 분, 집 없이 떠도는 분, 거동이 불편한 분, 뇌성마비를 앓은 분, 군대 가서 심한 구타를 당해 정신이 온전치 않은 분들을 집안으로 맞아들여 밥상을 차리게 했다. 우편집배원이나 배달하시는 분들도 함께 단골손님이 됐다. 스무 분의 점심상을 차려내는 날도 있었다. 날마다 잔칫집 같아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 지 대문은 열려 있었다.

고된 ‘봉제사 접빈객’ 덕분에

이 일이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 녹초가 될 만큼 몸은 고됐지만 나도 모르게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났다. 남편이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이 특별히 잘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남편은 늘 “우리가 열을 벌면 그 중 하나로도 (우리는)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했다. 열 중 아홉은 자신의 방식으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내 나의 좁은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생각 하나의 차이였다. 나의 것을 기꺼이 나누고 함께하는 일이 얼마나 자신을 충만하고 행복하게 하는지 남편을 통해, 나날의 체험을 통해 몸에 익혔다. 남편과 그렇게 의기투합했다.

‘봉제사 접빈객’은 힘든 만큼 선물이기도 했다. 여러 경우에 많은 손님치레를 하면 서 나의 음식 솜씨가 날로 늘었다. 날마다 손님상을 차리다 요리에 문리가 트인 셈이 었다. 손님이 많다보니 설거지는 반드시 끓이거나 삶아서 해야 했다. 덕분에 위생관념도 몸에 배었다. 음식솜씨와 위생관념은 가업인 식품회사 운영에 큰 힘이 됐다. 국내 최초이자 세계 최초로 된장에 대한 코셔(Kosher, 전통적인 유대교 율법에 따라 엄격히 규정한 식재료 및 음식에 대한 허용 기준. 매년 인증을 갱신해야 유효하며 세계 공통 식품 기준으로 신뢰도가 높다. 코셔 인증은 한식 세계화의 필수 과정이다.) 인증을 받을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이렇게 나눌수록 좀 더 크게 나눌 수 있도록 (재물이) 들어오거나 채워졌다는 점이다. 아무런 보상 없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나누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우리 부부는 운이 좋았다.

효부상 받던 날 만난 풍물

운명의 날. 달성군민체육관에서 효부상을 받은 바로 그날이었다. 수상자를 태운 가 마들이 행진을 시작할 무렵, 길놀이 풍물이 나를 흔들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 한 스물아홉의 귀 바로 곁에서 처음으로 들은 풍물 장단과 소리. 꽹과리는 건반으로 닿을 수 없는 마음 온갖 곳을 때렸고, 무장무장 태평소는 음표로 못 그릴 마음의 행로를 잇고 열었다.

이후로 나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딸이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라고 많은 공을 들었던 어머니의 반대는 완강했다. 처음 만난 풍물의 매력에 이끌리고 나자 그 어떤 반대도 이겨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풍물패 상쇠는 배관호 선생이었고 판은 호 남우도 부포놀음이었다. 선생은 지금 명인에 올라 명성이 높다. 당시만 해도 풍물패는 웬만한 의지와 강단 없이는 버티기 힘들 만큼 여건이 열악했고 고달프고 배고팠다. 수소문해서 선생을 집으로 청해 부포놀음 동작과 기법을 사사했다. 선생은 또 다른 한 분을 소개해줘서 두 분으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귀한 강의라 거실을 넓게 틔워 온 가 족과 동네 사람들이 같이 들었다.

두 분 다 시간 내기가 어려운 형편이 됐다. 더 깊은 풍물 공부에 갈급했던 나는 명인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가서 배울 작정이었다. 꽹과리는 서울의 김복만 선생, 설장 구는 동두천의 김경수 선생, 선반 설장구는 부여의 홍윤기 선생, 12발은 김해의 이금 조 선생, 상모는 부산의 이동주 선생, 부포놀음은 서울의 이준용 선생(작고)과 구례의 유순자 선생을 찾아가 배웠다. 용기와 열정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던 시절이었다.

이론도 교재도 악보도 없는 풍물 공부

풍물의 교수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원리나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이론 없이 시범을 보이고 그대로 따라 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악보도 없었다. 서양 음악 교 수법에 길든 처지라 더욱 어려웠다. 그래도 악착같이 배웠다. 선생을 따라다니다시피 묻고 물어서 악보를 새로 만들었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교재도 참고서도 없으니 직접 듣고 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선생과 선배들도 그렇게 배워왔으니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서울이나 김포는 매주 비행기 편으로 올라가 강의를 들었 다. 하루는 선생이 목욕탕에 가서 잠이 드는 바람에 나는 빈 강의실만 지키다 그냥 돌 아오기도 했다. 이마저도 선생이 더욱 바빠지면서 들을 수 없게 됐다.

2005년 이준용 선생의 인간문화재 전수조교가 됐다. 집과 전국을 돌며 풍물을 배우기 시작한 지 30년만이었다. 지금은 작고하신 선생은 내가 자신의 전수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젊고 유능한 후배들을 위해 비켜주고 싶은 마음에 전수자 대신 전수조교의 길을 택했다. 뻣뻣해서 좀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일명 뻣부포라고도 하는 부포 돌리기를 체득하는 데는 긴 시간과 공력이 들었다. 목과 온몸에 침을 서른 대씩 맞아가 며 배웠다. 부포를 단 상모가 보기에는 잘 돌아갈 것 같지만 실제는 두 손으로 용을 써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 능수능란하게 부포를 돌리는 명인들은 다 ‘죽을 만큼’ 고생을 해가며 배운 것이다. 부포놀음 12발 채상모돌리기까지 습득하는 데는 더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12발 채상모돌리기는 최다인원(12명) 공연 기네스 기록에도 올랐다. 요즘도 가끔 옛생각을 떠올리며 부포놀음 공연 판을 벌리기도 한다.

도전하고 꿈 이룬 자가 춤출 수 있다

30년 세월 동안 1년에 석달 이상은 집을 떠나 전국을 돌며 풍물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핑계로 집안의 손님치레와 공장 식구들 밥상 차리기를 게을리 한 적은 없지만 풍물 공부가 힘들 때도 많았다. 포기하지 않은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무거워진 몸을 남편이 추슬렀다. 집안에만 있으면 사람의 안목이 좁아진다며 여 비를 남도록 챙겨주며 등을 두들겨주었다. 보통 남편이라면 몇 달씩 집을 비우고 떠나는 아내를 뜯어말리지 않았을까.

부포놀음 뻣부포와 12발 채상모는 목을 젓고 고개 돌릴 때마다 세상을 휘감고 마음을 감싼다. 풍물에는 서양의 어떤 음악보다 강렬한 비트와 서정적 울림이 절묘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풍물은 슬픔이 지극한 사람도, 아니 지극한 슬픔을 헤쳐온 사람만을 진정으로 덩실덩실 춤추게 한다. 도전하고 꿈을 이룬 당신만이 인생을 춤출 수 있다. 진선화 시민기자 * 진선화 시민기자는 2010년 우도농악 무형문화재(부포놀음) 전수조교에 선정됐다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