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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책만큼 집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것은 없다

  • 입력 2020.11.08 00:00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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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도 않고 죽을 수는 없었다. "읽지 않아도 살 수는 있잖아" 했던 것은 내 삶이 없어서였다. 내 삶이 중요해지니 내 삶에 성의를 다하고 싶었다. 읽어야 할 책들과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졌다. 한쪽 벽이 책으로 가득한 잡지 속 사진을 보면서 책이 가득한 공간을 꿈꿨다. 한꺼번에 사들인 전집이나 비싼 장정본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들로 채우리라 다짐했다. 책장 곳곳의 빈자리는 이제부터 읽고 채워야할 나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책 읽기를 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맨 먼저 첫 페이지 귀퉁이에 날짜를 적고 도장을 찍는다. 전각을 하는 작가에게 부탁해 내 이름을 새긴 도장인데, 내 것이라는 징표는 내 것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어준다.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떠오르는 것을 적어놓는데, 생각에 틀이 생기고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의 생각이 담긴 글은 이다음에 읽어도 재미있을 거다.

다 읽은 책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도 재미있다. 읽지 않은 책은 짐이 되지만, 읽고 나면 나만의 보물이 된다. 내버려두면 거추장스러울 책이 정리를 하고 나면 훌륭한 장식이 된다. 읽은 책은 언젠가 내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연장이 될 것이다. 천장 끝까지 책이 꽂혀있는 책장과 책을 꺼낼 수 있는 높은 사다리가 있는 방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으로 꾸며진 방은 아름답다.

나는 내 방의 책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주제별로 분류하고 주제 내에서는 다시 작가별로 모아 놓는다. 나라별로 나눠서 꽂아도 좋고 표지의 색깔별로 꽂아도 예쁘므로 마음대로 하면 된다. 읽지 않은 새 책과 다시 읽고 싶은 책은 찾기 쉽도록 눈에 보이도록 꽂고, 이미 읽은 책과 곧 다시 읽지 않을 책은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꽂았다.

오래된 책과 해가 지난 잡지도 버리지 않았다. 허전한 것보다는 어느 정도 책이 있는 책꽂이가 보기에 좋다. 학창 시절부터 사용했던 온갖 사전들은 큰 것부터 차례로 쌓아올려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군데군데 아이들의 어릴 적 작품과 가족사진을 끼워 넣고, 사이사이 작은 단지나 꽃병, 예쁜 종이박스, 연필꽂이, 양초 같은 소품들을 올려놓았다. 이렇게 하고 나니 책만 있으면 답답할 공간이 금세 마음이 흐뭇해지고 눈이 즐거운 공간이 되었다.

책은 책장 깊숙이 꽂지 않고 앞으로 당겨서 꽂는다. 책에게 존재감을 주려는 것인데 책이 "나 여기 있소"라고 말하는 것 같아 좋다. 미술 도록이나 앨범 같은 크고 무거운 책들과 작은 수첩이나 노트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구두박스에 담아 책장의 아래 칸에 놓는다. 수납용으로 요긴한 구두박스는 여러 개를 쌓아도 좋지만, 크기와 색이 같은 동일 브랜드이어야 어수선하지 않다.

큰 책꽂이 하나는 모든 책을 하얀 페이지가 보이도록 옆으로 눕혀 쌓았다. 흰색으로 통일된 책들이 마치 '한지로 엮은 고서' 같아 차분한 느낌을 준다. 종이의 결만 보이므로 책을 찾으려면 모두 끄집어내야 하지만, 그런 번거로움을 무릅쓸 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사진이 많은 잡지를 이렇게 하면 알록달록한 사진들이 은은하게 보여 고급스럽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분위기다. 키가 비슷한 책들끼리 세우고, 덩치가 비슷한 책들끼리 모아 꽂으면서도, 다른 가구들과도 어울리도록 해야 한다. 나는 새로 구입한 책이나 다시 읽을 책의 일부를 책상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서너 권씩 포개어놓았는데, 서점의 진열대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다. 나에게 각별하고 의미가 있는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보면 기분이 좋고, 빈 책장에 책을 채워가며 늙어가기로 하니 의욕이 솟는다.

일찍 읽었다면 나를 위한 책 읽기가 아이들에게도 좋았을 거다. ‘내 아이들이 집안 장식은 필요한 만큼의 책꽂이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고 한 작가 애나 퀸들런 (Anna Quindlen)를 떠올리면, 책을 일찍 접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책을 사서 책장에 꽂는 일에 행복을 느낀다. 책만큼 집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것은 없다.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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