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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학교에서 제일 작았던 학생, '자랑스런 선배 1위' 되기까지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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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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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농업명장 1호' 이대건 명장이 난실에서 난 화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김민규 기자

 

"우리 학교의 '자랑스런 동문' 1위는 대한민국 농업명장 1호 이대건입니다!"

사회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환호가 쏟아졌다. 2013년 대구농업마이스트고등학교(옛 대구농고) 100주년 기념 역사관에 새길 '자랑스러운 동문 1위'가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갑자기 멍해져서 '이대건? 내가 이대건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급 인사들로 구성된 인선단이 국회의원을 비롯해 중견 기업을 이끄는 CEO 등을 다 제치고 '대구농고'가 낳은 가장 자랑스런 동문으로 나를 뽑았다. 원래 계획은 흉상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투표 결과 너무 젊은 졸업생이 선정되는 바람에 사진으로 대체했다고 했다. '그게 뭐 대순가!' 나는 내 이름이 세 번이나 호명된 뒤에야 무대로 걸어나갔다. 위원장과 회장님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실감이 났다.

"이 아이는 우리 학교에서 크게 될 인재입니다"

"이대건, 교무실로 내려와라."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교실 스피커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멀뚱히 스피커만 쳐다봤다. 내 이름이 불릴 이유가 없었던 거였다. 짝궁이 "너 부른다. 가봐라"하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에는 교무회의가 한창이었다. 선생님이 모두 모여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대건아, 이리 와라" 하고 불렀다. 교장선생님은 선생님들 앞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나를 세웠다. 모든 선생님이 나를 우러러봤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몸무게 40㎏에 키가 159㎝, 나는 전교에서 제일 작았다.

"이 아이는 우리 학교에서 크게 될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교장선생님이 내 귀를 만졌다. 평소에도 나를 마주치면 "귀 한번 잘 타고났다"고 말하면서 꼬집듯이 만지곤 했다. 선생님들이 교장선생님의 말에 수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차례가 박수가 쏟아졌다.

교장선생님의 성함은 권오갑. 대구농업마이스트고와 경북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겐 전설로 통하는 분이다. 지독하게 공부를 시켰다. 경북고등학교가 평준화된 이후에 비평준화 때만큼 성적을 낸 기간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분의 공로라고 전한다. 교장선생님이 교무실을 나오면 '범 내려온다'고 했다. 학생은 물론이고 교사에게도 회초리를 댔다. 한 초임 교사가 야간자습 시간에 교탁에 엎드려 자다가 "감독을 소홀히 한다"는 불호령과 함께 매를 맞았다.

나를 왜 그렇게 좋게 봐주셨을까, 지금도 정확하게 이유를 모르겠다. 1학년 때 4H클럽 활동에 참여하고 싶어 무작정 교장선생님에게 찾아가 "꼭 참여하고 싶다"고 큰소리로 외친 강단을 인정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런저런 이유로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도 반반이었다. 당신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다가도 눈앞의 현실을 생각하면 흰소리처럼 느껴졌다.

3년 중 1년은 도 닦으러 나갔던 아버지

"니는 참 복도 없다. 니는 우째 저절로 풀리는 일이 없노."

그 얼마 전 마을 어른이 내게 건넨 말이었다. 송아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2학년 2학기 때부터 염소를 키워서 1년 후에 송아지 한 마리를 산 거였다. 마을 어른과 동행했다. 내가 송아지 값을 치르고 나자 그분이 내게 물었다.

"송아지를 싣고 갈 트럭은?"

송아지 값으로 돈을 다 써버렸다. 고령에서 월배까지 송아지를 몰고 갈 생각이었다. 그분은 “이 날씨에 송아지 몰고 가다가 낙동강 건너기 전에 요단강 건넌다”고 했다. 부랴부랴 대구로 들어가는 트럭을 찾아내서는 소들 틈에 송아지 자리를 하나 얻어주었다. 그리고는 동정이 가득한 얼굴로 "니는 참 복도 없다" 하고 말했다. 아버지 때문에 한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주민번호보다 아버지의 주민번호를 먼저 외웠다. 아버지가 문제를 일으키면 으레 파출소에서 경찰이 출동했다. 또한 가정불화로 어머니가 친정으로 가고 나면 내가 보호자 노릇을 해야 했다. 경찰관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대고 아버지를 인계받아 집으로 모시고 왔다.

아버지는 도를 닦는 사람이었다. 계룡산, 오대산, 금오산, 태백산, 팔공산 일대를 다니며 자연 동굴이나 손으로 만든 토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도인 같은 말을 곧잘 했지만 한번씩 어머니와 크게 다퉜다. 그럴 땐 전혀 다른 모습이 됐다. 한번은 몇 시간이나 불을 밝히고 있던 백열전구를 빼내 입에 넣고 와구와구 씹었다. 피칠갑이 된 얼굴로 살덩이 같은 핏물을 뱉어내는 모습이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아버지의 기행의 정점은 청와대 투서 사건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하자 청와대로 이를 성토하는 편지를 보냈다. 초등학교 공책 한 권을 빡빡하게 채울 만큼의 양이었다. 밤에 군화를 신은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군인들이 올 줄 알았는지 다락에 있는 쌀 뒤주 뒤에 숨어서 자고 있었다. 군인들이 한 수 위였다. 다락문을 열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더니 "갑시다"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끌려가는데도 어머니와 나, 동생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뒤에 문중을 통해 어렵게 빼내긴 했지만, 아버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슬프거나 아쉬울 것이 없었다. 어차피 3년 중 1년은 산에서 지내셨으니까. 그리고 '대통령 모독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은 아버지에게 훈장이 되었다.

한번은 팔공산에 움집을 지었다. 불법구조물이었다. 새로 온 팔공산 관리인이 철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 모독죄로 청와대까지 끌려갔다 온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기도처에 딱지를 붙이고 나면, 아마 제 명에 못 사실 겁니다. 가만 놔두십시오."

그는 끝내 아버지의 수련장을 철거하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되는 일이 없네. 내 인생은…….'

가장이 수시로 가출하는 바람에 우리집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가난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부잣집은 다 우리집과 이웃하고 있었다. 젖소를 키우는 집, 큰 유리 온실을 가지고 있던 집, 그리고 번듯한 자가용까지 있는 조경 전문가가 사는 집이 우리를 둘러싼 형국이었다. 우리집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폭 꺼져있었다. 그 세 집 덕분에 우리집 풍경이 더더욱 남루하게 비쳤다.

일찍부터 돈에 눈을 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토끼를 키웠다. 중학교 때는 껌을 팔기도 했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염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들에 나가 풀을 베어와 염소에게 먹인 뒤 학교에 갔다. 염소를 팔아 소를 사고, 또 소를 키워서 목돈을 만져보겠다는 계획이었다. 포장마차도 해봤다. 동네에서 풀빵을 만들어 팔던 아주머니에게 리어카를 빌렸다.

둘째 날에 동네 '형님'들이 몰려와서는 음식을 잔뜩 시켜 먹고 나가면서 말했다.

"누가 돈 안 주고 행패 부리면 우리한테 이야기해라. 우리가 다 해결해줄게."

그러나 그 '형님'들 때문에 일주일 만에 그만뒀다. 거의 매일 와서 무전취식을 한 까닭이었다. 내가 아무리 깡 하나는 최고였다지만 대구농고 최단신에 50㎏도 안 되는 몸으로 팔뚝에 용이며 호랑이를 두르고 다니는 형님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운동화에 꽂혔다. 브랜드 운동화 한 켤레가 너무 사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이야기해봐야 씨도 안 먹힐 게 뻔했다. 동생과 함께 봉투를 팔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돌아오는 버스비는 없었다. 버스비 정도는 벌 것이라고 자신했던 거였다.

버스에서부터 판매를 시작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을 찾아서 전을 폈다. 그러나 동산병원 건너편 지하도 입구에서 팔기 시작했다. 우리 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리 없는 아저씨가 바닥에 누워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봉투가 너무 안 팔려서 나중에는 지나는 사람들 길을 막다시피 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쯤 흘러 사람들 발길이 뜸해졌을 때였다.

"너희들 딴 데 가라!"

누워있던 아저씨가 벌떡 일어서 있었다. 괴기영화를 본 것처럼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결론적으로 그날 봉투를 단 한 장도 못 팔았다. '되는 일이 없네. 내 인생은…….' 동산병원에서 월배까지 걸었다. 그때는 지하철이 없었지만, 서문시장역에서 월배역까지 열세 정거장을 거치는 거리를 걸어온 셈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다음 아이템은 미꾸라지 장수였다. 동생과 함께 쓰레기장에 가서 빈 명과 라면박스를 주워 모은 돈으로 그물을 샀다. 한창 비가 올 때 낙동강으로 갔다. 고기잡이에 열중하다 물에 떠내려가기도 했다. 갈대를 붙들고 겨우 빠져나왔다. 하루 종일 고생해서 잡은 미꾸라지를 대야에 담고 그 위에 소쿠리를 덮은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시장에 가려고 소쿠리를 들춰봤더니 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다.

"아버지, 여기 대야에 미꾸라지 못 봤습니까?"

마침 대문으로 들어서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감정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방생했다. 오늘이 중요한 절기라서."

하는 수 없었다. 다시 잡는 수밖에. 그렇게 여름 내내 미꾸라지를 팔아서 신발 살 돈을 구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돈을 모아 신발을 사러가는데, 원래 마음먹은 브랜드는 아니지만 나름 고급 브랜드의 가게에서 신발을 반값에 팔고 있는 걸 발견했다. 냉큼 그 가게로 들어가 신발을 샀다. 그런데 집에 와서 신어보니 짝짝이였다. 다시 가서 환불해 달라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왜 50% 세일이겠냐? 반값인 대신에 품질은 복불복이다. 1,999 켤레 중에 딱 한 켤레가 짝짝인데, 그게 너한테 걸려버렸네. 니가 운이 없다고 생각해라."

그마저도 이튿날 학교에서 누가 훔쳐 가 버렸다. 또 그 생각이 머리에 꽂혔다.

'나는 처음부터 되는 일이 없는데, 끝까지 되는 일이 없구나. 지지리 운도 없는 내 인생!'

"농업을 배워서 대성할 길을 찾아라!"

'파브르의 곤충기', 토끼, 염소, 송아지……. 어린 시절, 위로가 된 것들이었다.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지만, 토끼는 풀만 열심히 뜯어 먹이면 부지런히 새끼를 낳았고, 염소는 무럭무럭 자라 송아지를 살만큼 값이 나가줬다. 농업은 아버지와 가난한 집안이 나를 괴롭게 할 때 유일하게 나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중학교에서 다행히 농업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1회 입학생이었다. 학교가 대구시에 있었지만 선택 교과목으로 농업을 가르쳤다. 나에게 영어와 수학이 무너진 하늘이었다면 농업은 솟아날 구멍이었다. 농업은 늘 100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토끼를 키우면서 토끼를 팔아 농장을 만들 꿈까지 꾸고 있었으니 농업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질문도 제일 많이 했다. 하루는 농업 선생님이 나를 운동장 한켠에 있는 벤치로 불렀다. 그리고는 "대구농고에 가라"고 권했다.

"대건아, 니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농업이 우리나라 최고의 유망 분야다. 모든 기술은 어려서부터 배워야된다. 농업을 배워서 대성할 길을 찾아봐라."

그러면서 내게 자기 마음에 있는 모든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너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작고 덩치도 볼품없다. 집안이 든든한 것도 아니고. 사회적 약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농업은 타고난 것 같다. '농업이 내가 살길이다' 생각하고 거기에 매진해봐라. 내가 인간적으로 너한테 걱정도 많고 관심도 많다."

그 선생님은 내가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나와 함께 학교를 옮겼다. 그리고 2회 입학생부터는 농업 과목도 공업으로 바뀌었다. 농업은 나에게 단 하나의 행운이었다.

누군가 내게 "나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나는 "잘 둘러봐라. 하나는 되는 게 있을 것이다"고 말해준다. 농업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의 위치도 내게 자극이 되었다. 우리 집을 둘러싼 '부잣집'들은 모두 농업으로 성공한 집들이었다. 사방으로 내 삶의 목표를 제시했던 셈이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고, 은연중에 농업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던 것 같다. 내 주변에 고만고만한 집들만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공고나 인문계로 가서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전공을 원예과로 정할 때도 길잡이가 나타났다. 작은아버지였다. 작은아버지는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일 때 중동에 다녀왔다. 내가 농고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요긴한 조언을 건넸다.

"소나 닭은 옛날이야기다. 외국에 나가보니까 원예가 잘 되더라."

토끼에서 시작해 염소로 이어진 축산 경력을 접고 과감히 원예과로 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난초'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리고 2012년에 내 인생을 바꾼 사건이 터졌다. 그해 고용노동부장관이 '슈퍼스타K'를 보다가 "우리 기술인 중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을 경연으로 뽑아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경연은 산업현장 교수부, 명장부, 기능한국인 등의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나는 명장부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그 덕에 CF도 찍어보고 홍보대사로 1년간 활동했다.

"이대건 명장은 준비된 사람이었지. 얼마나 열심히 했어. 노력의 화신이야!"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전능한 신이 아닌 다음에야 준비도 없이 그 어려운 자리에 오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 외에 할 게 없었습니다. 삶은 다 무너졌고, 솟아날 구멍이라곤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기만 파고든 겁니다."

남들처럼 여러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기회였고 행운이었다. 내가 머리가 좋거나, 허우대가 좋았거나, 집안이 잘 살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달리 길이 없는 것이 오히려 살길이 된 셈이다. 그렇다. 이것이 100년 역사의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가 배출한 '가장 존경받는 동문 1위'의 실체다, 하하!

〈이 기사는 이대건 농업명장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가공해 작성했습니다.〉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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