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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족, 품질 만족... 젊은층이 돌아옵니다"

  • 입력 2020.09.08 00:00
  • 수정 2021.01.07 11:43
  • 기자명 김재현기자 오유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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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재 영진양복점 봉제실장이 맞춤양복 제작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재현 기자

 

패션의 도시 대구. 과거 대구 중앙로 일대는 양복점과 금은방, 양화 가게가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양복점은 중앙로에만 40~50곳에 이르던 시절도 있었다. 개성 있는 양복을 빼입고 대구 시내를 거닐던 멋쟁이들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섬유와 패션의 도시 대구라는 명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까지 성업하던 맞춤양복 시장은 산업화 이후 급속하게 쇠퇴햇다. 자동화된 기수로가 기계의 발달로 빠르게 또 대량으로 찍어내는 방식이 등장한 까닭이었다. 이 때문에 거리의 양복점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맞춤 양복은 다시금 도약의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다.

1960년대 초 18세 나이로 양복에 입문한 금영재(72) 영진양복점 봉제실장은 지난 7월 달구벌 명인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수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양복 한길을 고집해온 그는 2017년 한국맞춤양복기술경진대회 대상 수상으로 실력을 인정 받는 한편 교도소 직업훈련원 봉사 등 사회화원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 왔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나만의 기술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양복에 입문하게 됐다”며 “기술자들이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며 조금씩 익혔다”고 말했다. 고령의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양복 이야기에는 눈빛이 살아있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도제식으로 일했다. 하지만 당시 일감이 넘쳐난 덕분에 기술자들은 견습공들을 붙잡고 가르쳐주는 일은 드물었다. 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하며 가게에서 먹고 자기 일쑤였다. 그도 4년여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양복일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지만 후회는 없었어요. 일을 배우면 배울수록 맞춤 양복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죠.”

직접 만든 양복 입고 결혼식장 입장한 아들
24살 무렵 군대에 다녀오고 스스로 개업을 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접고 말았다. 그러다 만난 곳이 바로 지금의 영진양복점이다. 1980년 이 곳에 입사해 지금까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4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진양복점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이다. 금씨는 “너무 어린 나이에 개업을 하다 보니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있었다”며 “가게를 운영하는데 부담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처음 그의 아버지는 양복을 만드는 것에 대해 썩 탐탁지 않아 했다. 그는 “옛날 시골 가창면 산골에 살 때 아버지는 한복을 지어 입었다”며 “양복을 만들어드리면 한복을 입던 습관이 베어 좋아하시진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 결혼식에는 직접 만들 양복을 아들에게 입혔다.

“내 아들의 결혼식 옷만큼은 꼭 직접 만들어주고 싶다는 꿈이 있었죠. 직접 만든 양복을 입고 입장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현재 후학 양성과 양복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지역 내 다양한 곳에서 강의를 펼치고 있다. 대구대와 호산대, 영진전문대, 계명문화대 등 지역 대학교에서 특강과 외래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대구시에서 운영하는 동부여성문화회관에서 여성복과 명품복 기술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이 곳 회관에서 강의한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강의를 통해 기술을 배워서 취미 생활을 하거나 자격증을 따는 분들도 많아요. 좋은 성과를 가지고 찾아오시는 분들을 보면 저도 모르고 뿌듯하기 그지 없습니다.”

새 맞춤양복 해 입으면 사건이 잘 풀렸다던 변호사
오랜 시간 동안 한 곳에 머물렀던 만큼 기억에 남는 단골 손님도 많다. 그는 “한 변호사는 사건을 맡을 때마다 이 곳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며 “새 옷을 여기서 해 입고 사건을 하면 항상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고 말했다. 경기가 좋고 장사가 잘 됐을 때는 시간에 쫓겨 마감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한 손님이 주문한 양복 기한을 맞추지 못해 바지만 먼저 건네고 상의는 나중에 전달한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단골 손님들이 가게를 많이 찾아오셨죠. 하지만 그 분들도 나이가 많이 드시고 일부는 돌아가신 분들도 있어요. 이제는 새로운 젊은 단골 손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답니다.”

오랜 시간 한 길만 걸어온 탓에 회의감이 든 적은 없었을까. 그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라는 질문에 단호히 ‘없었다’고 답했다. 그는 “최고의 양복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모든 일을 해왔다”며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원단부터 제작까지 장인의 손길이 한땀한땀
맞춤양복의 장인이 전하는 매력을 뭘까. 그는 “자신의 가진 체형에 꼭 맞게, 개성을 살려 제작할 수 있다는 가장 큰 장점이 있다”고 역설했다. 또 손님이 직접 원단 샘플을 만져보고 디자인에도 직간접적으로 함께 참여할 수 있다. 각자가 가진 체형의 장점은 더욱 부각시키고 감추고 싶은 곳은 가려주면서 스타일까지 더할 수 있다.

맞춤 양복을 맞추는데는 통상적으로 70만원 정도가 든다. 고급원단을 사용할 경우 100만원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일반 기성복과도 품질에서부터 차이가 크다. 이 곳 영진양복점도 한 때 경기가 좋을 때는 해외에서 고급 원단을 수입해 양복을 제작하기도 했다. 맞춤양복이라는 자존심 아래 하급 원단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자신감이다.

"양복을 만들 때 카라와 소매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이 곳에 균형이 잡혀야 안정감이 있고, 앞 뒤 밸런스가 잡히기 때문이죠."

눈빛만 봐도 통하는 단짝
옆에서 금씨의 이야기를 듣던 영진양복점 김익주 대표가 한마디를 거들고 나섰다. 1945년에 생긴 영진양복점에 1979년부터 이 곳을 지탱하고 있는 그는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장본인이다. 그 역시 오랜 경력 동안 수많은 양복을 만들고, 상을 수상해온 양복 명인이다.

김 대표는 “당시 양복점 직원으로 일하며 현재 중앙로 아카데미 극장 근처에서 이어져오던 양복점을 이어받아 10여년 전 현재 자리로 이사하게 됐다”며 “봉제실장과도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오다 보니 눈빛만 봐도 통할 정도”라고 말했다. 영진양복점은 과거 한 때 40명이 근무할 정도로 한강이남에서는 가장 큰 양복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똑같은 건 싫어요” 새롭게 주목받는 맞춤양복 시장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다. 양복을 만들면서도 요즘 트렌드를 분석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연구하는 일도 빼놓지 않고 있다. 그는 “시대에 따라 스타일을 바꿔보고 새로운 시도도 하고 있다”며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해서 힘들긴 했지만 이 또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보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일반 기성복에 싫증을 느낀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도 맞춤 양복을 선호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김 대표는 “맞춤양복은 기성복에 밀리지 않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며 “개성을 중요시하고 희소성에 주목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알맞은 양복이 바로 맞춤 양복”이라고 강조했다.

각자의 개성이 선호되는 시대다. 이 때문에 맞춤 양복은 다시금 주목 받고 있고, 의류 시장에서 약진을 시작하고 있다.

“이번 달구벌 명인 선정이 우리들의 양복 여정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입니다. 맞춤양복의 새로운 매력을 알려 대구 양복의 명성과 명맥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오유나 객원기자
김재현 기자 k-jeah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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