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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곳곳에 작은 추억을 넣어두자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19.07.24 00:00
  • 수정 2022.02.23 10:08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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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살림살이가 참 많다. 사서 늘기도 하지만, 사지 않아도 살림은 늘어만 간다. 단출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면서, 나는 버리는 것만이 정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인이 된 아들과 딸의 어릴 적 그림들까지 버리지 않았다고 하면 아마 모두들 놀랄 거다.

돌아가신 엄마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했다. 물건을 쌌던 포장지를 접어 모아두고, 포장 끈도 돌돌 말아 보관했다. 그런 건 닮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나도 포장지와 리본을 차곡차곡 보관해둔다. 그 포장지와 그 리본으로 선물을 싸며 엄마를 생각한다. 물건이 귀한 시절이라 엄마는 아끼고 절약한다고 그랬을 테지만, 물건이 많아지고 흔해 빠진 세상이 된 지금 나는 환경을 생각해서 그런다.

두 아이가 어릴 적 그림들을 전부 꺼냈다. 이 다음에 들여다볼 걸 그때도 알았는지, 나는 귀퉁이에 이름과 날짜를 적어놓았네. 색연필과 사인펜과 물감으로 그린 비행기와 꽃과 로봇이 있다. 두 눈을 커다란 테두리로 가둬놓은 그림은 안경을 쓴 엄마 얼굴 인가보다. 무엇을 그린 건지도 알 수 없는 그림은 추상화려니 하면서, 굵은 선으로 그린 옆모습의 얼굴에서 피카소를 떠올린다. 선생님과 학생이 주고받는 대화를 그린 만 화 ‘맹구편’은 왠지 아재개그 같다.

1편: “‘덩달아’를 넣어 글을 지어라.” “저요! 덩달이 어머니가 말했다. 덩달아, 밥 먹 어라.”

2편: “‘책임감’이란 말을 넣어 글을 지어 보아라.” “저요! 할머니가 책가방의 책을 보고 말했다. 책임감?”

3편: “‘더불어’라는 말을 넣어 말을 지어라.” “저요!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라면 더불어터지기 전에 먹어라.”

그림들이 꽤 많다. 쓸모를 따지자면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는 물건이지만, 나는 그 냥 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흰색 액자로 통일했다. 들쑥날쑥 크 기가 다른 액자들을 모두 방바닥에 내려놓고, 퍼즐을 끼워 맞추듯 벽에 걸 위치를 정했다. 넓은 방 큰 벽에 걸린 스무 개도 넘는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어린이 그림 전시회라도 온 것 같다.

그냥 보기만 좋을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행복해진다. 옹기 종기 모여 있는 그림의 전체를 멀리서 바라볼 때와 가까이 다가가 하나하나 자세히 들 여다볼 때 모두 기분이 좋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한 일을 잘했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가. 아이들이 존중받고 인정받는다고 느낀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이렇게 한 벽에 전부 걸어도 좋지만, 여기저기 나눠서 걸어도 좋을 것 같다. 딸 방에 딸 그림 한 점, 큰 그림 옆에 작은 그림 한 점, 화장실에도 한 점. 집안 곳곳이 다 갤러리가 됐다.

내 삶은 반드시 내가 이루어놓은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흐뭇해하는 느낌, 살면서 느꼈던 그리움, 아쉬움, 아련함 같은 작고 사소한 정서도 나를 만든 것이리라. 추억을 꺼내 시각화시킨 물건들을 나는 낭만 이라 부르면서,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과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도 집에 꼭 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집에 그림 한 점 걸어놓고 살자. 소장하고 싶은 작가의 작품을 걸어도 좋겠고, 비싸 지 않은 신흥작가의 작품을 거는 것으로 그들을 응원해도 좋겠지만, 아이들 그림도 훌륭한 대체작품이다. 추억은 지친 마음을 위로하며 기운 차리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게 한다. 나는 아이들의 환한 모습을 보면서 내 삶에 집중할 힘을 얻곤 한다. 추억 은 간직해야 하며 또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추억을 불러오는 이유는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안겨주는 위로와 정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은 추억의 따뜻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 다정한 길동 무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억은 과거로의 여행이 아닙니다. 같은 추억이라도 늘 새롭게 만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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