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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히트곡 시력 잃은 뒤 시낭송 삼매경

“‘어머니가 자랑스러워요’ 하던 아들 생각하며 시를 노래합니다”

  • 입력 2019.07.20 00:00
  • 수정 2022.02.23 10:08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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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순 할머니가 손자 정욱진(산격중 3년)군과 함께 경북대 앞 커피숍에서 포즈를 취했다. 손자는 할머니의 손이 되어 할머니가 구술하는 내용을 받아적어 시와 수필을 완성시킨다. 박 할머니는 “할머니에게 극진하다”고 칭찬했다.

동갑이던 남편이 쉰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눈앞이 깜깜했는데, 10년쯤 뒤에는 정말 시력이 모두 사라졌다. 시각장애 1급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빴다. 교실 앞자리에 앉아서도 옆자리 짝꿍의 공책을 보고 필기를 했다.

일흔에 점자를 배웠다. 젊은 사람들은 곧잘 배우는데 나는 그저 손끝에서 좁쌀이 꼬물대는 것만 같고 의미를 건질 수가 없었다. 그만두겠다고 하니 같이 점자를 배우던 젊은이들이 “아직 앞날이 많이 남았는데 여기서 멈추면 안 돼요. 매일 오늘이 처음이란 생각으로 하시면 돼요”하고 설득을 했다. 젊은이들에게 배웠다. 끝났다 싶으면 처음이다, 하는 생각으로 극복하는 법이란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세상은 배울 일 천지다.

점자를 배우면서 시를 만났다. 어느 날 선생님이 점자 교과서에 담긴 시를 읽어오라는 숙제를 냈다. 윤동주의 서시부터 현대 시인의 시까지 다양하게 실려 있었다. 너무 좋아서 저녁 내내 시를 읽었다. 몇 편이 저절로 외워졌다. 그렇게 시낭송을 시작했다.

시에 빠져 살았다. 시어를 마음 깊은 곳에 흘려보내면 옛 시절 생각이 절로 났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6․25로 피란을 떠났고, 천안에 살다가 33살에 대구로 왔다. 공장에도 다녔고 시장에서 장사도 했다. 그렇게 남편과 함께 아등바등 5남매를 키웠다.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빚었다. 시어가 옛 생각을 헤집으면 혼자서 시간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2014년에 서울의 모 도서관에서 개최한 장애인 시낭송 대회에서 자작시를 낭송해 1등을 했다. 큰아들이 “우리 엄마 너무 자랑스럽다”면서 기뻐했다. 그 환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아들은 그렇게 기뻐한 뒤에 세상을 떴다. 동갑인 남편이 쉰여섯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내 곁을 떠났을 때보다 더 큰 흑암이 나를 덮쳤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꼭 맞다

지난 4월에 대구광역시립수성도서관에서 개최한 시낭송 대회에서 일반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손자가 고생이 많았다.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를 위해서 시를 읽어주기도 하고 내가 구술하는 글을 필사하기도 했다. 이런 효자가 없다.

상을 받으니 즐거운 일이 연이어 생겼다. 말쑥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시상식에도 참여했고 기자와 인터뷰도 했다. 기자가 오랜 인터뷰 끝에 “상을 받았을 때 누가 제일 먼저 생각나더냐”고 물었다.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시 선생님들요. 앞도 안 보이는 늙은이를 가르치시느라 선생님들이 너무 고생이 많았어요.”

내 대답을 들은 기자가 “정말요?”하고 물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후에야 깨달았다. 큰아들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리라.

생각이 나려면 잊혀야 하는데, 큰아들이 떠난 뒤로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늘 큰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시를 낭송하고 싶다. 아들이 가장 좋아했던 일이니까.

박정순 시낭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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