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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상화 생가터와 생가로 여겨지는 고택

시민기자 시시비비

  • 입력 2019.06.23 00:00
  • 수정 2020.11.11 15:12
  • 기자명 권도훈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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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대구 시민들이 이상화 고택은 알아도 이상화 생가는 모른다. 생가와 고택이 혼동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화의 연보가 누락됐거나 오류라는 얘기다. 대구를 대표하는 시인의 생가와 고택이 공공연하게 혼동되는 일은 부끄럽고 안쓰럽다.

생가와 고택이 혼동된다면 생가 안내문에서 고택을 설명해주고, 고택 안내문에서 도 생가를 설명해줌으로써 혼동이나 누락을 막을 수 있다. 더구나 생가와 고택이 직선 거리 500m 정도로 가까이 있을 때 이와 같은 ‘상호 안내’는 필수적이다.

생가터는 서문로 2가 11번지

나는 작년에 이상화 생가터에 한옥카페 ‘라일락뜨락1956’을 열었다. 손님들이 늘면서 ‘미처 몰랐던’ 이상화 생가터가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몇몇 관광 홍보물에만 이상화 생가터가 표시돼 있을 뿐 거의 모든 홍보물에는 이상화 생가터가 표시돼 있지 않다. 표시된 경우에도 지도나 약도가 정확하지 않다. 지금도 포털 지도에서는 ‘이상화 생가터’가 검색되지 않는다. 답답한 노릇이다.

이상화 생가터는 서문로 2가 11번지다. 이곳은 태어나서부터 32세 때까지(1900~1932) 상화의 본가였다. 이곳에서 상화는 8세에 부친 이시우를 여의었고 1919년 대구만세운동때 쓰일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가 발각돼 서울로 탈출했다. 상화는 1919년 서순애와 결혼해 이 집에서 가정을 이뤘다. 1923년 일본 유학 중 ‘백조’ 3호에 ‘나의 침실로’를 발표했고, 1926년 ‘개벽’ 70호에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다. 같은 해 장남 용희가 태어 난 곳도 이 집이었다. 1928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거사하다가 체포돼 구금 후 풀려난 곳도 이 집이었다. 사랑채의 당호(집이나 건물의 이름)를 ‘담교장’이라 하고 항일인사와 전국 문인들의 출입처로 삼은 것도 이 집이었다. 이후 가세가 기울어 1932년 생가를 처분하고 장관동 50번지로 이사했다.

생가에서 32년, 고택에서 4년 살았다

32년 동안 상화의 본거지였던 생가터는 길이 빛날 상화 문학이 꽃핀 자리다. 상화의 젊음과 좌절, 울분이 뒤섞인 곳이다. 수많은 사연과 일화가 깃든 기념비적 장소, 생생한 역사의 숨결이 담긴 기억의 공간이다. 상화의 형 이상정 장군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사한 장관동에서 1934년 상화의 차남 충희가 태어났다. 얼마 후 남성로 35번지로 두 번째 이사를 했다. 1937년 종로2가 72번지로 다시 이사했다가 1939년 현재의 고택 계산동 2가 84번지로 이사했다. 상화는 1943년 4월 25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화 고택은 시인이 네 번째 이사한 집으로 말년 4년 동안(1939~1943) 거주했던 곳이다. 2002년 시민들이 뜻을 모아 ‘이상화 고택 보존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고, 2008년 중구 계산동 2가 고택을 복원했다. 고택의 그늘에 가려 생가터는 더욱 잊혔다.

어렵게 이 집을 구해 힘들게 리모델링했다. 입구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기 위해 앞집 주인의 허락을 받으러 갔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앞집 주인은 원래 자기 집이 이상화 생가 한옥이었는데, ‘문화재로 등록하면 재산권 행사를 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한옥을 허물고 현재의 3층 다세대주택을 지었다는 것이다.

11-1번지에 붙인 생가터 안내판은 잘못

마침 아는 분이 찾아서 보내준 생가 배치도에도 생가 주소는 서문로 2가 11번지였다. 당시 지적도와 토지대장을 떼어 확인했더니 생가터인 11번지는 1956년 4곳으로 토지 분할됐다. 11-1번지 대문에 ‘이상화생가터’라고 붙인 안내판은 잘못된 것이었다. 11번지 전체가 생가터라고 해야 맞다. 당시 지적도만 확인하면 바로 알 수 있는데도 10여 년째 엉터리 안내판을 붙여 놓았다.

구청의 담당자에게 확인해 보니, ‘신택리지’라는 책을 참고해 그런 안내판을 붙였다고 했다. ‘신택리지’를 구해서 확인해 보니, 책 내용이 오류였다. 이상화 생가터가 11-1번지로 표기된 부분(216p)도 틀렸고, 상화가 고택에 살던 시기에 ‘나의 침실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다(261p)는 내용도 틀렸다. ‘나의 침실로’는 1923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6년에 발표했다. 둘 다 상화의 생가 시절이다.

현재 ‘라일락뜨락1956’은 생가 안채 자리에 해당한다. 한옥은 1956년에 지어진 집이다. 이 지역은 재개발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어 이대로 둔다면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생가터 마당에 있는 라일락은 200년 넘게 이 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매년 4월 상화의 생일 무렵이면 만발해서 짙은 향을 흩날린다.

드디어 나타난 상화 생전 라일락나무 목격자

카페가 들어서고 4개월쯤 되던 어느 날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이상화 시인의 막내아들 태희와 같은 반 친구였던 배용묵 선생이다. “마당에 들어서 라일락을 보는 순간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는 대륜고 3학년 시절인 1954년 이곳에 와서 나무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상화의 시집이나 전기, 관련 자료 어디에도 라일락나무에 관한 내용이 없어 미스테리처럼 의아했는데, 상화 생전 이 라일락나무를 본 목격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올해는 마침 3·1운동 100주년이다. 봄마다 만발하는 ‘상화 나무’ 라일락도, 이 집터도 이제야 제 자리, 제 기억을 되찾게 됐다. 민족시인 이상화와 낭만주의, 상징주의 이상화가 기분 좋은 듯 라일락 꽃그늘을 의좋게 거닌다. 생가와 고택이 지척에서 이어지는 이 지역은 상화 문화, 상화 정신의 특구다. 품격 있고도 격정적이며 의지적이고도 순정한 상화 시의 울림과 깨우침은 늘 풍성하고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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