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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의 달, 경산코발트광산을 가다

증오를 넘어 아픔을 만지다

  • 입력 2019.06.23 00:00
  • 수정 2020.11.11 15:12
  • 기자명 김경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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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코발트광산 수직 제1갱도(수직 제1굴) 입구.

다시 6월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6월은 1년 중 가장 힘든 달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무용담을 많이 들었는데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다. 다만 박격포 사수여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기억한다. ‘박격포 사수’ 아버지는 살아남았지만 한 쪽 귀가 심하게 멀었다. 어느 날 귀가 아주 불편해진 아버지는 보청기를 맞추러 가셨다. 그때 따라 갔다가 들은 이야기가 지금까지 남은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기도는 군에 간 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했다. 기도는 아버지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뒤에도 계속됐다. 아니, 돌아온 아버지까지 참여해 기도는 더욱 엄숙해졌다. 전쟁이 멈춘 지 66년, 기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부모님은 아흔이 넘으셨다. 남은 두 분의 기도는 변함없이 간절하다.

아버지가 살아온 다음에도 계속된 기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는 전장에서 돌아왔고 전쟁은 멈췄는데 기도는 계속됐다. 살아 돌아온 아버지까지 기도를 함께 했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세 분의 기도는 뭔가 남달랐다. 아버지는 시계수리점을 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시계점에서 배운 기술로 해방 이태 후 시작한 일이었다. 아침저녁 기도 때마다 부모님은 가게 입구를 이중 삼중으로 잠가 놓고도 늘 불안해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수시로 찾아온 사람들은 손님이 아니라 경찰이나 방첩대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시계수리점을 겹겹이 잠그는 것은 도난 방지를 위해서였고, 수시로 찾아온 사람들은 뒷돈을 챙기려는 권력기관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진로 걱정을 하던 나를 어느 날 아버지가 조용히 불러 앉혔다. “너는 공무원 같은 건 할 수 없다. … 대학에 가더라도 데모 같은 걸 해선 절대 안 된다. 무슨 혐의를 뒤집어쓸지 모른다. 명심해라.”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나자 어릴 때부터 뭔가 이상했던 집안 분위기와 기도 의식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부모님의 얘기는 이랬다. 전쟁 터진 지 석 달. 대구를 방어하기 위한 낙동강방어선 팔공산전투가 위태로울 때였다. 마을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했다. 가입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고 했다. 생사의 갈림길이 한순간인 전쟁통에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살려준다기에 가입한 보도연맹증은 평생 씻을 수 없는 낙인이 됐다. 보도연맹 가입 명부는 곧 살생부로 둔갑했다. 붙들리면 ‘골로 가는’ 예비검속이 시작됐다.

예비검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남다

며칠 후 아버지를 잡기 위해 다시 경찰이 들이닥쳤다. 촛불을 들고 아버지가 숨어있는 지하 창고까지 들어갔다. 사색이 된 할머니와 어머니는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을까. 촛불이 아버지가 숨은 곳 가까이서 꺼졌다. 아버지는 붙잡히지 않았다.

구사일생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이웃 어른들의 조언에 따라 바로 군에 지원했다. 지금의 대구남산초등학교에 소집돼 전선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보기 위해 어머니는 갓 태어난 큰누나를 들쳐 업고 달려갔다. 아이가 울다가 똥을 싸서 치마에 칠을 해도 몰랐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는 24살, 어머니는 20살이었다.

소집 장정’ 아버지는 줄을 잘 서 박격포 사수가 됐다. 무거운 포를 메고 끌고 해야하는 고된 병과였지만, 소총수에 비해 인명 피해가 적었다. 아버지는 박격포 사수가 된 덕분에 귀는 좀 먹었지만 살아남았다.

전역한 아버지는 다시 시계점을 열었다. 경찰, 방첩대 사람들은 계속 찾아왔다. 가끔 아버지가 그 사람들을 따라나서면 나도 같이 따라갔다. 아버지가 두어 분과 병풍 쳐진 술자리 저편에서 심각한 듯 이야기 나눌 때, 한복 차림의 서너 분이 나와 같이 놀아줬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행방이라도 알기 위해 어린 나를 술집으로 따라 보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절박함이 느껴질 때면 눈물이 핑 돈다.

차마 갈 수 없었던 곳을 가는 마음

오늘은 아침부터 마음이 무겁다. 대구시민인권아카데미 동료 수강생들과 경산코발트광산을 탐방하는 날. 늘 궁금했지만 혼자 갈 엄두는 나지 않던 곳이었다. 만일 아버지도 구사일생으로 체포를 피하지 못했다면 같이 희생됐을지 모르는 곳.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으며 집을 나섰다.

임당역 3번 출구에 모인 수강생들은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가 제공한 25인승 버스를 타고 20여 분 더 달렸다. 경북 경산시 평산동 652-21. 대원골 경산코발트광산 입구, 컨테이너 두 개가 보이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경산코발트광산은 2개 수직굴과 2개 수평굴로 이뤄져 있다. 안내를 맡은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는 이 광산을 중심으로 주변 대원골 등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됐다고 설명했다. 위령탑은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희생자 127명의 이름과 함께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1,600여명의 영령’을 위로하고 있다. 위령탑을 뒤로 하고 제2 수평갱도 탐방에 나섰다.

그날 수직갱도에서 벌어진 비극

드디어 수평갱도와 수직갱도가 맞닿는 곳. 비극의 현장에서도 바로 그곳이다. 붕괴를 막기 위해 설치한 철제 H빔이 가슴 높이에서 갱도를 가로막았다. 수직갱도는 50m깊이 수직1굴만 개방돼 있다. 수직굴은 중간에서 수평1굴, 수평2굴과 각각 만난다. 학살은 수직1굴에서 이뤄졌다. 위에서 여러 명을 굴비처럼 묶은 채로 그대로 밀어뜨리 거나, 몇 명만 총으로 쏘아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떨어지도록 했다고 최 대표는 설명했다. 사실상 생매장이었다.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2009년 11월 17일 진실 화해위원회는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로 판정했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나 범죄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해 경찰과 군의 자의적 판단만으로 집단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며 그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진실화해위원회는 규정했다. 학살 피해자는 정부 추산 2,000여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종결된 후 발굴은 중단돼 이곳에는 수천 구의 유골이 방치돼 있다.

증오와 대립을 넘을 수 있는 것

피해는 희생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 가족이나 친척들까지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돼 40여 년 동안 연좌제 등의 감시와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공직은 물론이고 해외유학조차 갈 수 없어 대부분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속에 살아야 했다. 20여 년 전부터 유족들은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아무런 보존 시설도 없이 컨테이너에 ‘임시 보관 중’인 유골들은 올해 안에 이곳을 떠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억울한 원혼들을 한곳에 모시기 위해서다.

말 못하는 억울한 원혼들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산 사람들이다. 지난 2000년부터 해마다 7월에 올리던 위령제는 3년 전부터 9월 9일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햇살 뒤편에 그늘이 있다. 이념보다 무서운 것은 증오다. 증오와 대립으로는 증오와 대립 을 넘을 수 없다. 증오와 대립을 넘는 그 무엇이 서로의 고통을 고통으로 이해하게 할까. 가장 견디기 힘든 달 6월이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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