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개원 후에도 새벽까지 공부 ‘즐기는’ 치과의사 의가형제

  • 입력 2018.12.11 00:00
  • 기자명 김광원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봉열, 문홍열 형제 “치의학계에 두고두고 기억될 족적을 남기는 것”이 꿈

[저작권 한국일보]문홍열 원장은 초등학교 4학년 운동회 때 처음으로 달리기를 했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 달리기를 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펑펑 울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운동회 계주에 참가해서 뛰었어요.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펑펑 울었죠.”

지금은 같은 치과 의사지만 처음에는 너무 달랐다. 형은 유치원 때부터 천재라고 불렸고, 동생은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소아천식 때문에 7살 때까지 1년 중 절반은 병원에 머물렀다. 동생은 “공부는커녕 건강하게 스무 살을 넘기는 것이 목표였다. 공부는 언강생심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대구에 치과를 연 문봉열ㆍ문홍열 형제의 이야기다. 세상 구경은 형이 먼저 했지만 치대 입학은 동생이 먼저였다. 동생이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던 형을 설득해 서울대 치대로 이끌었다. 봉열씨는 “어릴 땐 늘 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이제는 동생이 선배가 되었다. 건강 걱정 없이 서로 도우면서 같은 길을 걷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동생 홍열씨가 건강을 회복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 등에 업혀서 등교를 했다. 4학년 때 뜀박질을 시작했고, 5학년 때 축구 게임에 낄 수 있었다. 몸은 좋아졌지만 공부는 이제 시작이었다. 다행히 어릴 때부터 숫자에 관심이 많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쓴 문자가 숫자였다.

중학교 때 수학에서 성적을 내더니 다른 과목도 서서히 성적이 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경기도 구리 남양주시에서 전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개최한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친구 덕도 봤다. 중학교 때 ‘수학 귀신’으로 통하는 친구를 만났다. 선의의 경쟁으로 서로에게 가장 좋은 라이벌이자 벗이 되었다. 게다가 친구의 아버지가 지역에서 제일 큰 학원을 운영했던 까닭에 시험 기간에는 학원 건물 1개 층을 통째로 공부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늘 천재 소릴 들으며 자란 형은 동생을 “암기력, 집중력 대장”이라고 소개한다. 암기력이 워낙 좋아 고등학교 때 예체능 포함해서 전과목 만점을 4번이나 받았다. 동생은 형의 평가에 손사래를 쳤다. 그저 “집중하려고 무진 애를 썼을 뿐”이라고 했다.

“학원에서 공부할 때 1시간 동안 책상으로 벽을 쌓았어요. 책상으로 공부 감옥을 만든 거죠. 화장실 가는 통로만 만들고 그 안에서 책에 파고들었습니다. 1시간 공부에 15분 휴식을 정해놓고 4시간 넘게 공부에 매진했죠.”

암기법에 관해서도 “그저 앞글자만 따서 외우는 법 정도가 비결”이라고 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 목표를 정하면 최대한 이루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암기력과 집중력을 강화했을 뿐입니다.”

공부에만 전념한 것도 아니었다. “시간의 절반을 친구 만나는 데 썼다”고 고백했다. 수능 마치고 휴대폰을 구매해서 번호를 입력하는데 530명의 이름을 등록했다.

형에게도 공부 외에 잘하는 것이 있다. 손이 예민했다. 어릴 때부터 요리를 즐겼다. 틈만 나면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게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손을 부지런히 익힌 결과 치대에서 실습에만 들어가면 늘 칭찬을 받았다.

성격과 개성이 다른 만큼 제일 잘하는 분야도 제각각이다. 발치와 수술은 형이, 교정과 신경치료는 동생이 주로 맡는다. 한 환자를 형제가 번갈아 가면서 치료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학회의 회원 소속으로 미국과 일본을 다니며 지식을 습득했고, 진료 방식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거쳐 손발을 맞춘 지 오래되었다. 완벽한 호흡을 자랑한다. 그만큼 환자의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형제의 공부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형제는 치과를 연 이후에도 주말이면 새벽 2~3시까지 공부를 즐긴다. 공부할 거리를 찾는 건 으레 동생 홍열씨라고 했다. 형은 “동생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긴장된다”고 했다. 답을 찾는 작업은 함께한다. 주로 형이 국내외 논문을 찾아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형제는 “환자가 요구하는 수준 이상의 완벽주의를 추구할 때가 많다. 우리는 아직 공부하는 중”이라고 입을 맞추었다.

두 형제의 목표는 같다. “혼자서는 못하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늘 들었던 말이 “형제가 함께하면 못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형제는 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말씀대로 치의학계에 두고두고 기억될 족적을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동생 홍열씨는 ‘인맥왕’답게 “대구가 마음에 들어서 대구에 정착하려고 내려 온 만큼 주변 분들과 함께 대구에 좋은 에너지를 불어넣는 역할도 하고 싶다”는 소망을 덧붙였다.

형인 문봉열(왼쪽)원장과 동생인 문홍열 원장은 타지에서 형제가 한 병원에서 나란히 개원했다. 대구 서울바른플란트치과 제공.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