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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미 TBC 앵커의 ‘나의 아버지’

  • 입력 2017.02.07 00:00
  • 수정 2017.02.08 10:19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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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미 TBC 앵커. 뉴스룸에서 포즈를 취했다.

나는 1학기 수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2000년대 초반이라 지역 고교에서는 아직 정시에 매달릴 때였고 수시는 대부분 관심 밖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수시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고 선생님도 내 뜻을 흔쾌히 받아주셨다. 낯선 길에 과감히 뛰어들었고, 나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내가 수시에 그토록 매달렸던 것은 정시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였다. 하루라도 빨리 입시라는 짐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입시만으로도 힘든 시기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까지 겹치는 바람에 가슴에 큰 돌덩이 하나가 얹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학교를, 그리고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 프라이팬에서 탈출해 불길로

나는 수능 100일을 앞두고 자유를 얻었다. 대학에 입학한다고 모든 것이 풀린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뜻밖의 방향으로 진행됐다. 친구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쟤 아빠가 한양대에 잔디 깔아줬대.”

“기부를 몇 억쯤 했다던데.”

다들 예민한 때라 아무에게도 “그게 아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동네 어른들도 “부자 3대는 간다는데, 병원이 망하긴 했어도 딴 주머니를 챙겨놨겠지”하고 수군댔다. 아무도, 우리 집안의 진짜 사정을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때 대구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한의병원을 운영했다. 한의사가 10명, 직원만 해도 100명에 가까웠다. 단식 프로그램 운영으로 서울에서 연예인이 내려와 다이어트를 했다. 전국에서 환자가 몰려왔다. 90년대 초반에서 IMF 직전까지, 말 그대로 황금기였다.

그 굳건해 보이던 탑을 무너뜨린 건 IMF였다. 병원을 확장하면서 대출을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금융위기로 아버지는 신용불량자 신세로 전락했다. 주머니에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엄마, 이게 뭐야?”

하루는 소파 뒤에 뭐가 붙어있었다. 붉은 색이었다.

“암 것도 아냐.”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를 벽에 바짝 붙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것이 ‘빨간 딱지’라는 것을 눈치 챘다. 내심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집안에 일어난 것이었다. 나 역시 “어딘가에 돈을 숨겨놨겠지”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말의 기대마저 와르르 무너졌다. 그때부터 가슴에 체증이 생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부유하게 살아온 나였다. 겨우 살던 집 한 채 건졌다는 말을 못 믿을 만도 했다. 내가 매점에 들어서면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양 우리에 늑대 한 마리가 불쑥 쳐들어오면 그런 분위기가 아닐까 싶었다. 답답한 상황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서 수시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막상 성공하고 나니까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탈출해 불길로 뛰어든 거나 다름없었다.

- 빨간딱지를 숨긴 어머니

가장 힘들었던 건 당연히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옳은 길이라고 판단하면 거침없이 돌진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마도 결혼한 후 처음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성격 혹은 삶의 철학을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은 바로 어머니와의 결혼이었다. 아버지는 약대를 졸업하던 해에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 작전을 짰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 내용이 당돌하면서도 재밌다.

아버지는 약사보다는 한의사가 비전이 좋은 것 같아 한의대로 진학할 계획을 짰다. 본인이 공부를 할 동안 집안 경제를 책임여줄 여자를 찾았다. 그러기에는 약사가 최고였다. 거기다 맏사위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11남매 중 8번째였다. 형제가 너무 많이 소외감을 느낄 때가 많으셨던 것이다. 이왕이면 장인이 공직자에다 조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셨으면 하는 바람까지 항목에 넣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 뒤 대구 시내 약사 명부를 가져와 적당한 사람을 골랐다. 추려진 여자가 모두 12명, 아버지는 한 명씩 찾아 다녔다. 첫 번째 약국을 방문해서였다.

“제가 소개시켜주고 싶은 남자가 하나 있는데, 만나보실래요?”

아버지는 자양강장제 한잔을 마신 뒤 말을 걸었다. 약사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러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퇴근 후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소개시켜주고 싶은 남자가 바로 나”라고 밝힌 뒤 이렇게 말했다.

“저하고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그 여자 분은 집에 가서 “오늘 재밌는 일이 있었다. 처음 만난 남자가 프러포즈를 했다”고 말했는데, 뜻밖에 부모님이 관심을 보였다. 부모님이 “그 남자 한번 보자.”고 했고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 뜻밖에 결실을 맺었다. 그 여자 약사분이 내 어머니가 됐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아버지는 한의대를 졸업했다. 졸업식에 참가해서 사진을 찍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 유치원에 다닐 무렵, 가족 나들이.

아버지는 의지와 신념이 확고한 만큼 교육도 엄하게 하셨다. 오빠와 나, 둘 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비교적 내가 더 힘들었다. 오빠는 아버지와 한번 목표를 두고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으로 엇나갈 일이 전혀 없었고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순수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산타클로스를 믿었다. 언젠가 손톱 옆에 피부가 부스러기처럼 일어나서 보여줬더니 오빠는 “너 엄마 말 안 들었구나!”하고 말했다. 어머니가 “엄마 말 안 들으면 부스러기 생긴다”고 하시는 걸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오빠가!

오빠는 화가 나면 피아노 연주로 화를 삭힐 만큼 착한 학생이었다. 나에게 큰소리를 낸 적도 없었고 늘 부모님에게 순종적이었다. 생각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아 재수를 하고 싶어 했지만 집안 형편을 걱정해 결국 포기했다. 원래 길로 돌아오기까지 9년이 걸렸다. 몇 해 뒤부터 다시 입시를 준비해 수능을 두 번 더 보고 의학대학원을 준비해 결국 입학에 성공한 것이었다. 의학전문대학원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위인전의 주인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초중고 시절 오빠만큼이나 학교와 도서관, 집밖에 모르고 살았다. 대학을 한양대로 진학해 대구 탈출에 성공했지만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워서 나이트 한번 못 갔다. 그때 친오빠가 서울에 같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곁길로 새면 당장 보고가 올라갔다.

한번은 찢어진 청바지를 산 적이 있었다. 찢어졌다고는 하지만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흉내만 낸 청바지였다. 아버지는 청바지를 보시더니 “거지들이나 입는 옷”이라면서 당장 환불하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몰래 짐가방에 넣어주신 덕에 대학 교정에서 입고 다닐 수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댄스 동아리에 들어갔다. 물론 아버지에게 모두 말씀을 드렸다. 너무 답답하다고, 뭔가 스트레스를 풀 데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긴 하셨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주셨다. 지금까지도 시스타 댄스까지는 능숙하게 출 수 있다. 대학시절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다.

- 아나운서 아카데미의 모범생

집안이 힘들었던 만큼 무슨 일이든 각오가 남달랐다. 어느덧 학교에서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질 즈음 나도 어김없이 취업 걱정에 빠져들었다. 영어 동아리에서 우연히 학교 선배를 만났다. 방송 쪽에서 일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대학생 리포터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방송반을 했었다. 전공은 실내건축이었지만 방송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배를 따라 얼마쯤 리포터로 활동하다가 ‘정식으로 시작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학원비 주세요”하고 부탁했다. 어머니의 약국 수입 대부분이 아버지의 빚을 갚는데 쓰였을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기였지만, 나는 애써 당당한 척했다. 어머니가 마른 오징어 짜듯 지갑을 열어 돈을 내주신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했다.

수업은 일주일에 이틀 이었지만 나는 매일 나가서 연습을 했다.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마. 넌 열심히 하잖아!”

아카데미 과정에서 절반쯤 지나자 강사들이 나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불안한 마음을 내비치면 강사들은 ‘네가 안 되면 누가 되겠니’하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고마운 위로였고 격려였다.

그렇게 4학년을 꼬박 아카데미에 투자하고 나니 졸업이 코앞이었다. 압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수히 원서를 쓰고 시험을 쳤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위로라면 1차 통과에서 2차 통과, 2차에서 3차 통과로 통과하는 차수가 높아졌다는 것뿐이었다.

“되실 거예요. 우리 미용실에서 메이크업 받은 분은 다 돼요. 바로 지난번 시험에서도 그랬어요.”

울산ubc에 시험을 봤을 때였다. 작은 미용실에서 메이크업을 받았는데, 원장이 자기 미용실이 “로또 명당처럼 아나운서 합격 명당 미용실”이라며 자랑을 했다. 급한 대로 가까운 미용실로 갔던 터라 그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감이 상승해서였을까 나는 실수 없이 테스트를 끝냈고 얼마 후 합격 통보를 받았다. 어머니와 얼싸안고 방방 뛰었던 추억이 생생하다.

- 갑작스런 아버지의 암 수술

그 사이 집안에는 또 한번의 풍파가 지나갔다.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 처음 암이 찾아온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그때 오빠와 대학교 봄 축제에 놀러 갔었다. 술을 못 마셨기 때문에 조신하게 공연만 보고 있었다.

해가 뉘엿해진 무렵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수신 버튼을 누르는데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가 무거웠다.

“아빠 암 수술했다.”

‘아빠가 암이란다’가 아니고 이미 암 수술을 했다는 것이었다. 피에 소변이 나와서 병원에 가봤더니 의사가 “암일 수도 있다. 조직 검사를 해보자”고 했더니 아버지는 “검사할 필요 없고 내일 바로 수술합시다”고 했다는 거였다.

그렇게 며칠 사이에 후닥닥 수술을 했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연락할 틈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무튼 수술 잘 끝났다”하고 안심을 시키셨지만, 나는 축제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놀라기도 했지만 갑자기 아버지의 나이가 느껴졌다. 늦은 나이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거였다.

5년쯤 뒤에 다시 암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머니가 “아버지 폐에 뭐가 있다는데, 암이 전이된 걸 수도 있단다”하고 말씀하셨다. 내과교수들은 모두 암이 재발한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수술했던 의사만 “전이가 아니다”고 했다. 일주일 넘게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악성종양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온 가족이 호흡을 멈춘 채 일주일을 지낸 기분이었다.

“내 생각엔 말야, 네 아빠가 잘 망한 것 같아.”

암의 그늘이 걷힌 후 어머니가 내게 하셨던 말씀이었다.

“우리가 지금도 부자로 살고 있었으면 어쩌면 네 아버지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다는데, 그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어머니의 말대로 금전적으로 풍요로웠다면 건강을 잃었을까. 그런 경우는 자주 본 것이 사실이다. 어머니의 말 덕분에 미열처럼 가슴 언저리를 맴돌던 지난 아픈 기억들이 씻겨나가는 듯했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가슴을 활짝 열고 맑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키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했고, 집안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옛날만큼의 부는 아니지만, 조금씩 회복을 해나갔다. 빚도 갚고 한의원도 예전의 명성을 회복해갔다. 어머니의 말대로 더 큰 일 대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 원장실에 앉아 계신 '나의 아버지'. 힘든 일을 겪은 후 병원은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회복했다.

- 세상에, 아버지가 설거지를!

아버지가 완전히 신용을 회복한 것은 내가 결혼할 무렵이었다. 스물일곱 되던 해, 아버지는 갑자기 “스물여덟이 되기 전에 결혼하라”고 하셨다. “딸이 스물여덟이 되도록 시집 안 가는 건 죽어도 못 보겠다”고 못을 박았다. 나는 웃었다. 아직 한창 일 할 나이라고 생각했고, 결혼은 먼 미래의 일처럼 여겼던 까닭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단호한 태도에 선을 보러 나갔다.

첫 선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처음에는 선뜻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훤칠하고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외모가 부담스러웠다. 처음 보고 와서 어머니가 “어떻더냐?”고 묻는 질문에 “잘 생겨서 부담스럽다”고 대답했다.

남편이 적극성을 보였다. 남편은 그때 강원도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내가 근무하는 울산으로 자주 찾아왔다. 그렇게 인연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통분모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남편의 동생이 의학전문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오빠는 당시 의대를 다니고 있었다. 첫 번째 공통점이었다. 두 번째는 어머니와 시어머니 모두 약사였다. 게다가 여고 선후배 사이였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기쁨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시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이런저런 공통점 결혼이 갑자기 급행열차를 탔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난 뒤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아버지 병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20년 만에, 드디어, 온전히 회복을 한 셈이다.

그 사이 나는 직장을 옮겼다. 울산은 아무래도 타지였고,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할 상황이었다. 마침 TBC에 자리가 났고 무사히 경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결혼을 시작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무엇보다 바뀐 건 아버지였다. 외손자가 태어난 뒤로 ‘아버지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하는 생각을 종종 할 정도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셨다. 우리에겐 늘 엄한 아버지였지만, 외손자에게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사셨지만, 핏줄 앞에선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장 파격적인 소식은 어머니에게 들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늦게 전화를 걸어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아빠가 설거지를 하셨단다. 내일 저녁에는 달 대신 해가 뜨겠다.”

나는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엄마, 아버지한테 앞으로 설거지 하시려거든 가족들한테 우황청심환 한 알씩 돌린 다음에 하라고 하세요. 지금 가슴이 마구 뛰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그때부터 내게는 아버지가 ‘두 얼굴의 사나이’로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 역시 ‘두 얼굴의 여자’인 것 같다.

▲ 그림 4뉴스룸에서 한복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 ‘두 얼굴’의 김명미

2016년 9월, 경주에서 큰 사건이 있었다. 대구를 비롯해 전국으로 곧장 파장을 일으킨 자연재해. 바로 지진이었다. 나는 지진이 일어나던 바로 그 시간에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세트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몇 가지 생각이 스쳤다. 미사일 공격, 대형 폭발 사고, 지진. 하지만 사실을 확인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일단 준비한 뉴스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이 나간 후 나는 ‘지진 아나운서’라는 별칭을 얻었다. SNS에 ‘멋있다’, ‘존경스럽다’, ‘감동 이상의 전율을 느꼈다’ 같은 댓글이 달렸다. 방송 당시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이혁동 앵커를 비롯해 카메라, 오디오, 기술, 음향 감독은 물론이고 자막을 맡은 인턴까지 누구 하나 자리를 이탈한 사람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나 혼자 칭찬을 받는 것 같아 쑥스러운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내가 대학 시절 댄스 동아리를 했고 가사가 아름다운 노래만 들으면 눈물샘이 폭발하는 ‘소녀 감성’이란 걸 누가 알까. 그 부분이 알려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울 정도다.

나는 두 가지 다를 부모님에게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가진 꼿꼿한 원칙주의와 어머니의 감성이 모두 내 안에 있다. 아버지 역시 엄격하고 과감한 성격에 어머니의 온화한 성품이 깃든 것 같다. - 가족은 닮는다고 하니까.

내 안에 있는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 내 남은 삶의 숙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원칙을 지킬 땐 지키고, 정서적으로 반응해야 한 곳에서는 한없는 정으로 다가가는 것이 내 삶의 목표다. 아버지가 보여주신 바로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내 삶을 온전히 지켜주신 부모님처럼 나 역시 남편과 아이에게 정서적인 울타리가 되어주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남편에는 늘 고마운 마음이다. 주부로서 방송인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는 나를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면서 부모님 못지않게 응원하고 지원해주는 남편에게 무슨 말로 고마운 마음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더불어 부모님의 노년을 아름답게 꾸며드리고 싶다. 그것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과 지혜, 그리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주신 부모님에 대한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

▲ 사랑하는 남편, 아들과 함께.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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