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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랫물이 맑으면 윗물도 정화된다

  • 입력 2017.02.02 00:00
  • 수정 2017.02.06 16:14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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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는 "삶은 B와 D 사이의 C"라고 했다. 즉, Birth(출생)와 Death(죽음) 사이에 무수한 Choice(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깊은 밤 한적한 사거리의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보자. 일찍 귀가해 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고만 싶은 마음만 간절한 당신에게 빨간색의 정지 신호는 야속하기만 하다. 이럴 때 무단횡단의 유혹이 다가온다. 선택의 순간 앞에 놓이는 것이다. 날도 춥고 차도 없는데 그냥 건너자는 마음과 법을 지켜야 한다는 시민으로서의 의무감이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법은 사회구성원의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규정해 놓았다. 법을 어긴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룰이 무시된다면 우리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밀림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융통성은 필요하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선택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말이다. 누군가가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는 소통이 불가하거나 고집불통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옛 책을 참고해서 말하자면 융통은 대개 원칙 아래 놓인다. 큰 흐름을 결정하는 철학적 바탕(道)에 특별한 기준과 원칙(立)을 정한 다음 융통(權)을 발휘하는 것이다. 철학이 동일하더라도 원칙이 다를 수 있고, 원칙까지 일치한다 해도 융통에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어떤 융통이 옳은지 그른지는 일차적으로는 원칙으로 판단하고, 그것이 안 되면 철학적 바탕을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원칙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취지를 살리고 철학적 바탕을 고려해야 진정한 융통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예를 찾자면,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바꾸는 것은 규칙을 어기는 것이지만 진료시간 후에 방문한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다. 다른 환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용한 융통성이다.

최근 우리는 융통이 원칙을 뒤엎고 심지어 철학적 바탕까지 무시하는 현상을 보았다. 그들이 부린 무도한 융통 때문에 국가의 근간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안하무인의 태도와 공격적인 사업 추구 방식은 횡단보다 앞에서 고민하는 소시민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횡단보다 앞에서 두 손을 호호 불며 파란불을 기다리고, 병원에서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순서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원칙주의’가 이 나라를 떠받치는 가장 확고한 기반이라는 것을.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희생하고, 주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는 융통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살기 좋게 만드는 선의의 융통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지만, 가장 아래에 있는 바닷물이 윗물을 정화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백성이 맑으면 윗물을 정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공자는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政者正也). 국민의 철학이 윗분들의 원칙 없는 융통을 바로잡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아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 김지만(저작권보호원 감수위원,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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