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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카페 (3) 판도라

최악의 원전재난, 강력한 국가는 어디로 가고 가족주의가 호명되나

  • 입력 2017.01.06 00:00
  • 수정 2017.01.09 16:22
  • 기자명 김윤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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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에서 원전 밀집도 1위의 국가이다. 2016년 현재 4개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총 24기의 원자로가 가동 중이며, 전체 원자력 발전소 단지 반경 30km 이내에 9개의 광역자치단체와 28개의 기초자치단체가 밀집해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많은 나들이 탈핵을 결정하였지만 한국은 현재 6기를 추가 건설 중이며 4기의 건설계획은 진행 중이다.

 

영화는 끝났고 엔딩 크레딧이 올랐다. 어쩌면 이 영화는 저 엔딩 크레딧을 정확히 이해하고 정확히 대처할 수만 있었다면, 굳이 만들 필요도 볼 필요도 없는 영화였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반대였고, 엉망진창이었고, 상상 한참 이하였으며, 단 1%의 가능성이 실현됐고,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엄청난 일이 벌어졌으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책임 지는 사람은 없었고 그리고 또 다시 사태는 반복됐다.
국가 권력에서 공공성은 쫓겨나 얼어죽고 시스템은 헐렁한 팬티처럼 그냥 흘러내린 것이 분명해진 2017년 벽두 대한민국. 국가 자체의 권능을 정지시키거나 파산시키고 싶도록 망가진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은 촛불을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었다.
국가와 공권력이 무력하고 무능하기만 할 때 모든 문제의 최대 최종의 책임은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이때 가장 쉽게 동원되는 가족애다. 너의 가족을 위해 네가 희생해라.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복선도 함정도 없다.
그 어떤 해결책도 출구도 찾을 수 없을 때 그때 불려 나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며 대의에 복무하도록 감복시키는 바람잡이가 가족애라면, 그런 가족애는 딱할 뿐이다. 진정한 가족애란 내가 나와 나의 가족만을 챙기기 위해 다른 수천 수만 수백만의 목숨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면, 기꺼이 나와 나의 가족만을 챙기는 바로 그 일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철저히 금지하는 것이다. 내 가족을 호강시키려고 남의 가족을 파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가족애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원전 폭발 현장으로 다시 들어가는 재혁(김남길 분)을 향해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말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의 시스템과 안녕을 블랙아웃시킨 원전 마피아들과 이에 결탁한 공무원들에게 하는 말이다.
방호 장비를 완전히 갖추고 들어가도 치명적인 피폭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진통제를 한통 통째로 먹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다. 그곳에 누군가를 들여 보내야 할 때 그 누군가를 설득하는 유일한 수단이 가족애라면, 나는 인류의 이름으로 그런 가족애를 거부한다.
그때 진통제를 한통씩 먹고 완전 방호복 차림으로 폐연료봉 저장수조로 들어가야 할 사람은 따뜻한 가슴과 정의감을 가진 박 소장(정진영 분)이나 재혁이나 길섭이들을 수조에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 온 국민은 비상시 그들의 등에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는 총을 겨누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그들의 임무를 잠시라도 방기하는 순간 방아쇠는 당겨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돈에 팔아넘기는 공직자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0% 안전한 원전은 물론 없다. 그러므로 100% 안전한 원전을 요구할 수는 없다. 다만 단 1%의 위험성이라 하더라도 투명하고 정당하고 적절하게 공개하고 대처하고 해결하는 공정하고 정직한 관리자를 요구할 뿐이다. 그것은 원전을 운전하고 운영하는 모든 비용을 세금과 요금으로 대어주는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제는 한국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의 고정 틀을 깰 때가 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1초 1초가 위급한 순간에 짐작건대 전체 시간의 20% 이상을 신파로 허비하는 재난 영화는 황당하다. (모든 가족주의가 다 신파인 것은 결코 아니다.) 몰입을 위해 과거 시제를 넘나들며 집중된 그 긴 앵글들이 결정적으로 몰입을 방해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상황에서 원전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과 스탭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원전 사고는 가족애라는 지극히 개인적 영역의 이념형으로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해서도 안 된다. 그런 상황이라면 국가는 존재할 이유를 상실한다. 존재할 필요조차 없는 국가가 계속 존립하기 위해 개인에게 곧 죽음인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 상황이라면 국가는 이미 해체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봐야 한다. 왜 이 영화를 봐야 하는지는 보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재난 후진국’ 대한민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다. 재난 후진국, 그 부패와 비리의 커넥션을 끊어내기 위해 영화를 보는 일 말고도 해야 할 일들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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