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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 유명상(대구한국일보 대표이사)

늙은 몸 아직도 하늘을 꿰뚫을 뜻을 품고 있나니!

  • 입력 2016.11.16 00:00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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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가신 뒤부터 독도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독도의 달인 10월 들어서서는 일주일에 2~3차례씩 대구와 경북을 누비면서 우리가 독도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강연이지만 적극적이고 뜨거운 반응에 우리 땅 독도를 온전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이달에는 교단에 서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많았습니다. 특히 경북 지역 교장선생님들 앞에서 했던 강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독도가 우리 땅인 이유”를 묻는 말에 목소리를 높여서 독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던 분들이 눈앞에 보이는 듯합니다. 젊은이들 못잖은 열정이 느껴져 내심 감동을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특히 독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아사이 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1991년 8월에 한국 언론보다 먼저 위안부 사건을 보도했는데, 그는 대학 신입생 시절 같은 기숙사에서 재일 한국인 선배를 만나 한국의 역사와 재일 조선인 차별 문제 등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인만큼 밖으로 나가기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어학연수로 유학으로 세계에 나가 우리 역사와 독도 문제를 자연스럽게 알린다면 이보다 더 큰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잘할 수 있다고 해서 젊은 층에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뛰어든 운동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독립운동이 일제를 위협할 만큼의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70대 청년 김가진 선생
노년 독립운동가의 대표를 꼽으라면 저는 이 분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바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선생입니다. 동농 선생은 70이 넘은 고령에도 피가 끓는 젊은이 못잖은 파격을 보여준 인물로, 가장 역동적인 조선인 중의 한 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유난히 적극적인 성격을 보였습니다. 선생은 서얼로 태어났습니다. 출세가 막힌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억울한 마음을 상소에 담아 임금께 올렸습니다. 이 상소가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냈습니다. 문장이 워낙 빼어나 바로 벼슬은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다양한 관직을 거치면서 조선이 부강해지는데 기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890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영국의 탐험가 겸 화가인 아널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 Savage Landor)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동농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다. 내가 만난 수많은 외교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고 중국어도 능통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이 안 되었는데도 영어를 능히 이해하고 읽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선생이 사회 활동을 그만둔 것은 1910년이었습니다. 조선이 강점된 해입니다. 선생은 고관 76명과 함께 귀족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사회 활동을 접고 조용히 살았습니다. - ‘조용히’ 사는 것 자체가 친일이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고 여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이 다시 피끓는 청년으로 돌아온 것은 1919년이었습니다. 3.1 운동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생은 비밀리에 대동단을 결성해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해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의 망명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선, “상해 임시정부는 하층민이 모인 집단”이라고 선전한 일제를 머쓱하게 만들었고, 조선의 고관들이 모두 합병에 찬성하고 만족하고 있다는 선전을 무색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에 큰 폭탄 하나를 안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73세 청년은 상해로 온 뒤에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대동단을 이끌어가는 동시에 북로군정서의 고문을 맡았습니다. 그의 손자 김자동에 따르면 이승만이 탄핵을 받았을 때 그를 대신해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로 거론되기도 했을 만큼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당시의 73세는 지금으로 치면 100세에 가까운 고령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20대 청년 못잖은 열정과 실천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하는 질문을 던지는 CF가 있었습니다. 김가진 선생의 예를 들자면 70대도 20대처럼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민족입니다.
강점기는 끝났지만, 일제가 제일 먼저 탐냈던 우리의 땅 독도는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김가진 선생처럼, 어린 학생들 이상으로 열띤 호응을 보였던 교장선생님들처럼, 세대를 막론한 뜨거운 열정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로 똘똘 뭉친다면 세계가 독도의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본이 더 이상 독도에 대한 망언을 퍼붓거나 침탈하려는 시도를 이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억지스런 주장이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달에도 많은 분들이 독도바르게 알기 운동에 동참하셨습니다. 나이를 불문한 지지와 동참 덕분에 독도바르게알기 운동이 더욱 탄력을 받고 힘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이 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하는데 있어 젊은이들의 열정과 어르신들의 ‘청년 정신’이 가장 큰 에너지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동참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김가진 선생이 1919년 11월 4일 독립신문에 실은 시 한수를 소개하겠습니다. 선생의 ‘청년 정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돌아가시고 사직은 기울었는데도
부끄러움 안고 죽고 싶어도 참으며 여태껏 살아있도다
늙은 몸 아직도 하늘을 꿰뚫을 뜻을 품고 있나니
단숨에 솟아올라 만 리 길을 날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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