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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무박2일 (1)서문시장 군고구마 가게 박선옥씨

  • 입력 2016.06.02 00:00
  • 수정 2016.06.13 14:53
  • 기자명 김윤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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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정직 '당당한 그녀' 억대 연봉 부럽지 않아요

‘이 바쁜 도시’에서도 가장 먼저 문을 여는 곳은 시장이다. 서문시장에서 새벽 6시는 새벽이 아니다. 새벽 3시 무렵 장이 다 서는 매천시장(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이라면 곧 파장이랄 수도 있지만, 아침 6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서 막 일어났거나 일어나려는 시간. 서문시장 식당이나 채소가게, 건어물가게, 좀 있으면 가방가게 등이 문을 여는 시간이다. 이 아침부터 시장에 군고구마 냄새가 풍긴다. 의아스럽다. 이 시간에 웬 군고구마? 달고 구수하고 노릇노릇한 냄새. 얼마지 않아 주변은 군고구마 굽는 냄새로 진동한다. 군고구마는 소문낼 필요가 없다. 화통 속 고구마 단내가 사방팔방 소문을 낸다.

 

밝은 성격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군고구마 가게에 ‘꽂힌’ 것은 고구마 굽는 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이시간 시장의 표정은 생각과는 달리 밝지 않다. 전날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거나, 긴 불황에 이골이 났거나, 뭔가 어제 좀 힘들었던 그런 표정들이다. 그런데 군고구마 가게 박선옥(38) 씨는 달랐다. 무엇보다 표정이 밝고 활기찼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환하게 인사를 했다. 슬쩍 지나치며 왜 이렇게 일찍 문을 여느냐고 물었더니 스스럼 없이 말해줬다. 긍정의 에너지, 숨길 게 없고 꿀릴 게 없는 솔직담백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몸 놀림이 재빨랐고 리듬감이 있었다. 진도 사투리와 대구 사투리가 뒤섞인 말씨가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 듣는 사람을 즐겁게 했다. 밝은 성격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선옥 씨는 남해와 서해가 서로 만나는 다도해, 전남 진도 사람이다. “제주도,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이라 농사 짓는 사람도 많았어요. 아버지는 집앞에 집채보다 큰 하우스를 6~7동 짓고 채소 묘종을 키워 팔았어요.” 수박·참외 등 과일·채소농사도 몇 가지 했다. 일은 주로 여자가 다 하고 남자는 빈둥거리면서도 대접 받는 게 섬의 풍속도였지만, 아버지는 부지런했다. 농한기에는 할 일이 없어 노름에 빠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여장부 스타일이었어요. 손이 컸어요. 하우스와 집이 이어지는 너른 마당에 부침개를 하는 날이면 작은 동네 잔치를 했죠.” 어머니는 부침개를 부쳐도 ‘크게’ 부쳤다. 사람들과 나눠 먹고 퍼주기를 좋아했다. 선옥 씨의 집 마당은 ‘장소가 좋아서’ 늘 동네 사랑방이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1남 2녀의 둘째딸인 선옥 씨는 어릴 적부터 유쾌 발랄했다. 공부는 별 재미가 없어서, 공부보다는 놀기에 더 바빴다. “바닷가며 산이며 놀 게 왜 그리 많던지.지금 생각하면 공부가 재미 없거나 싫었다기보다는 공부가 그리 중요한지 몰랐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선옥 씨는 부지런한 건 아버지를 닮았고, 손 크고 퍼주기 좋아하는 건 어머니를 닮았다.

 

일찍부터 철든 생활력 강한 ‘진도 여자’
선옥 씨는 철이 일찍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어요. 어머니가 종일 밭에서 일하고 왔는데, 주방에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으면 얼마나 힘들까 싶은 거예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설거지를 시작했고 집안 심부름도 많이 했다. 언니는 새침한 성격에 좀 까칠했단다. “어머니도 시키기 편한 저한테 자꾸 시켜더라고요.” 선옥 씨의 여장부 스타일도 어머니를 닮았다. 여자가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섬의 풍속때문에 섬 여자들은 생활력이 강했다. 어머니도 그랬고, 선옥 씨도 그랬다. 그녀는 몸부터 먼저 움직인다. 이것저것 재기만 하는 것은 질색이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인지 모른다. 어머니는 선옥 씨를 ‘뜰꽃’이라고 했다. 진도 사투리로 ‘어디에 던져놔도 잘 살아갈 생활력이 강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란다. 선옥 씨의 어릴 적부터 꿈은 화가였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거든요. 풍경화가 좋았고,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당연히 고등학교 때 진학 목표는 미대였죠. 그런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어머니가 학원에 보내주지를 않는 거예요. 그때(20년 전) 한달 미술학원 과외비가 200만원 씩 했거든요. 시골이다 보니까 보통은 부모님이 논 팔고 밭 판 돈으로 학원을 가고 그랬어요.” 어머니는 고2 중반에야 집안 형편이 조금 풀려 학원에 보내줬다. 서울 홍대 부근 고시원에 방을 얻고 열심히 학원을 다녔다. 선옥 씨의 원래 지망은 서양화과였는데 도예과 지망 친구들이 조소를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도예과로 전공 지망을 바꿨다. 그녀는 일에 한번 꽂히면 빠졌다. (빠졌다는 말을 진도 사투리로 ‘빻는다’고 했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재미 있어서 밤에 잠도 오지 않았어요. 밤을 꼬박 새가며 매달렸죠. 집에도 가지 않고 도예에 빠져가지고….미쳤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도예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일에도 그랬죠.” 일단 긍정하고 전력투구하는 성격. 그런 성격은 지금도 그렇다. 열심히 학원을 다녔지만 고2 때는 너무 늦었다. 입시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성적에 맞춰 서울과 강릉 몇 군데 합격을 했는데, 서울은 너무 숨이 막혔고 강릉은 진도에서 너무 멀어 대구의 예술대 도예과를 선택했다. 선옥 씨가 대구에 정착하게 된 계기다.

 

‘바닥에서 시작하라’ 시장에서 본 희망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니까 학비가 너무 비쌌어요. 포기하고 미술학원 교사를 했어요. 월급으로는 방세와 생활비도 빠듯하거나 모자랐어요. 급여가 괜찮다는 옷가게에 들어갔죠.” 미술을 전공한 덕분에 손님에게 맞는 옷을 잘 골라줬다. 손님이 늘었다. 용기를 얻어 다음해 베네시움에 직접 옷가게를 차렸다. 1년 반 만에 시내 중심가 엑스밀라노로 옮겼다. 잘 됐다. 그러다 남편을 만났다. 울산 사람 남편은 국악을 전공했다. 학창시절 남편은 예체능 수능 전국 1등이었다. S대에 1차 합격했지만, 피리를 전공한 국악과 지망생인데도 피아노 실기를 요구했다. 그는 지역 국립대 국악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고민 끝에 남편은 칠성시장 장어골목에서 장어집을 시작해 7년째 성업 중이었다. 매출
은 늘 다른 집의 두배였다. 너무 바빴다. 부부는 정신없이 일했다. 순옥 씨가 임신을 하자,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지금까지의 ‘뒤바뀐’ 생활은 불가능했다. 아기를 위해 남편은 13년 동안 올인해 온 식당을 접었다. 부부는 비로소 낮에 움직이고 밤에 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찾았다. “2년 정도의 공백기를 거쳐서 남편은 매천시장 채소 도소매 일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자리를 잘 잡았어요. 그리고 저는 서문시장으로 오게 됐어요” 선옥 씨가 서문시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5년 전. “서문시장에서 식당을 하는 아는 언니가 배달 일을 좀 거들어 달라는 거예요. 일을 겁내지 않는 저인지라 그러겠다고 했어요. 막상 해보니 시장 사람들과 너무 친해졌어요.” 성격 밝고 부지런하고 붙임성 있는 그녀는 일년도 채 되지 않아 그녀는 시장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시장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시장에서 식당 배달을 한다는 것은 ‘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게 조금도 부끄럽거나 힘들지 않았다. 재미 있고 기운이 났다. 그렇게 시장 사람들과 친해졌고 시장을 배워서 시장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남편이 도소매하는 채소를 받아다가 시장 식당에 대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점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그녀는 다섯 번이나 쫓겨났다. 계약 기간이 끝났다고, 또 세를 갑자기 많이 올려서….우여곡절 끝에 채소 가게 자리를 잡은 그녀는 겨울이 하도 추워서 난로를 갖다 놨고, 연료비라도 벌자 싶어 고구마를 구워 팔았다. 그런데 군고구마 손님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시장 사람들에게 아침 식사로 군고구마가 먹힌 것이다. 간편하고 든든했다. 마침 웰빙 바람과 다이어트 바람이 불면서 소문을 탔고 그녀의 군고구마 가게 앞은 장사진을 이뤘다. 성공이었다. 성공의 요인은 ‘바닥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손해 보고도 팔 수 있는 그녀의 배짱
이 시장에 군고구마 가게는 하나 뿐이다. 장사가 좀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달겨들 텐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구마도 채소라 가격 등락이 엄청 심해요. 작년에 1kg 5,000원 하다가 올해는 50,000원 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고구마 값이 10배 올랐다고 군고구마도 10배 올릴 수 있느냐. 없어요. 작년과 같은 값으로 팔아야 해요. 만일 값을 올리면 손님은 다 떨어져요. 한 번 떨어진 손님은 안 돌아와요. 손님들은 값이 오르면 안 사먹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럴 때는 손해 보면서 팔아야 하는 거죠.”
손해 보는 장사에 장사(壯士) 없다. 손해를 계속 버틸 사람은 없다. 손해가 계속되면 누구라도 털고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세상 일이란 게 올랐으면 내리기 마련. 계속 오르기만 하는 일도, 올라서 내려 오지 않는 일도 없다. “그러니까 값이 오른 기간에는 손해 보고 팔 수 밖에 없지만, 값이 오른 재료(생고구마)는 비싸서 잘 안 팔리 값이 내릴 수밖에 없잖아요. 보통은 생고구가 값 오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까 손해 보고 군고구마를 팔면서도 버틸 수 있는 거죠. 그 기간이 길면 저도 못 버티죠.” 때로는 손해 보고도 팔 수 있는 배짱과 자금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런데 구멍가게를 하면서 그런 배짱과 자금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지금 시장 군고구마 가게는 선옥 씨 혼자란다. 선옥 씨의 배짱과 자금력의 배경은 남편이다. 남편은 매천시장(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 채소류 산지유통인이다. 그의 거래선과 업계 관계자들을 연결해 보다 싼 도매가에 가장 좋은 고구마를 떼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또 하나 그녀만의 차별화된 성공 요인이다.

숨김 없는 솔직함이 믿음을 얻는다
그녀는 솔직하다. 또 손님 입장에서 생각한다. 오늘 구운 고구마가 맛이 좀 없으면 팔기 전에 손님들에게 미리 말한다. “오늘 군고구마는 맛이 좀 없어요.” 그러면 5,000원 어치를 사려던 손님은 3,000원 어
치만 산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이 나쁘다는 얘기는 절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칙 상 ‘반복 학습’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파는 물건이 무조건 좋다고 손님을 설득해야 한다고 어느새 믿게 된 것이다. ‘(제가 파는) 물건 좋다’고 말해야지, ‘물건이 나쁘다’는 말은 장사하는 사람이 절대로 해서는 안될 말이 됐다. 그래서 어디서 산 물건이 좀 시원찮을 때는 ‘장사꾼이 그렇지 뭐’ 하고 넘어간다. 물론 눈에 보이거나 명백한 하자가 있는 경우라면 반품하거나 교환하겠지만, 채소나 과일, 음식과 같은 경우, 맛이 좀 덜하다고 물어내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선옥 씨는 굳이 말해서 ‘손해’를 자초한다. 장사꾼은 그러면 안 되는데. 그녀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내 입에 맛이 그러면, 손님들 입에도 그럴 거 아니에요. 사람들 입맛이 까다롭다지만 비슷해요. 제가 파는 군고구마를 사서 먹어본 손님들이 실망하면, 속상하지 않겠어요. 저도 속상해요. 미안한 거죠. 자존심도 상하고요. 그런 건 싫어요.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그게 마음이 편해요.” 그녀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당연한 말이다. 이 당연한 말이 낯설고 고맙다. 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세상, 시장에서. 비록 5,000원 어치 팔 것을 3,000원 어치밖에 팔지 못 했지만, 선옥 씨의 말은 한 치의 신뢰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을 얻었다. 그녀의 가게 앞에 손님 줄이 긴 이유 하나를 또 알았다. 그녀 또한 손님을 믿는다. 많은 언니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군고구마를 저울에 달고 알아서 돈을 주고 간다. 고구마 굽느라 바쁜 그녀를 대신해서. 재밌는 가게다. 오늘 군고구마가 좀더 맛있다면 그것도 말할까. “예, 그럴 때도 말해요. 오늘은 맛이 좀 괜찮네요 해요. 그러면 3,000원 어치를 사려던 손님이 5,000원 어치를 사기도 해요.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웃음)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행복해지잖아요. 손님들을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맛있어서 또 찾게 하고 싶어요. 저의 군고구마 맛을 못 잊게 하고 싶어요.”

군고구마 익듯 노릇노릇 익는 꿈
선옥 씨는 억대 연봉이 부럽지 않다. 얼마를 버는지 밝힐 수는 없지만 많이 벌거나 적게 번다고 우쭐하거나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그녀는 소중한 꿈을 향해 한발한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60쯤 되면 촌집 하나 구해 들어가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해요. 천연염색으로 나만의 그림을 그린, 이 세상에 한벌뿐인 옷들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요. 시장에 와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나의 꿈,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거죠. 가능하다면 사업으로 연결시키고 싶어요. 남편도 그때 되면 다 내려놓고 촌으로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돈을 벌기 위해 살지만, 그때는 나를 위해 살고 싶어요.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야죠.”
10살 차이가 나지만 선옥 씨와 남편은 많이 닮았다. 살아가는 일에 계산을 앞세우지 않는다. 주관이 뚜렷하다. 부지런하다.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죽어도 하기 싫다. 그녀는 치열하게 산다. 12시간 이상 일하는 그녀는 일과 아이를 위해 다른 대부분의 삶은 포기한다. 집에 들어가서 초등 4학년 딸아이를 돌보고 청소하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잠잘 시간도 부족하다. 인터넷 서핑은커녕 TV 볼 시간도 없다. 그러고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 학교 보내고 출근이다. 남편은 새벽 2시나 3시, 그녀는 새벽 6시에…. 그녀의 꿈, 부부의 꿈, 신새벽이 밝다. 군고구마가 익어가듯 그들의 꿈도 곧 노릇노릇해질 것이다.
 

김윤곤기자 seou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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