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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김영창 ‘(주)와우축산유통’ 대표

  • 입력 2016.06.02 00:00
  • 수정 2016.06.08 17:23
  • 기자명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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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높은 사랑, 강처럼 깊은 인내!

 

어느 날, 한 남자가 우리 집에 쌀포대를 들고 왔다. 내가 물었다. “이게 뭡니까?” 그는 내가 쌀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지 이렇게 대답했다. “쌀입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낯선 사람이 왜 내게 쌀을 주는 걸까. 그는 내 표정을 이해했는지 명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상인동 수해 피해 입은 생활보호대상자를 대상으로 구호물품 배달 중입니다. 김영창 씨 맞으시죠?”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순간, 독한 술을 들이켠 것처럼 눈앞이 핑 돌았다. 믿겨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수 십 억대 자산에 50평대 아파트도 3채나 가지고 있는 나에게 왜 구호물품이 온 걸까. 아니, 아니다. 이제는 내 소유가 아니다.’ 그때 아내가 지청구처럼 늘어놓던 말이 천둥소리처럼 내 귓전을 때렸다. ‘

 

여보, 이제 주식 그만해요. 잘하던 일 그만두고 갑자기 왜 그래요.’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처음 이사 온 사람처럼 내 방을 한번 휘 둘렀다. 50평대 아파트가 아니었다. 아파트는 커녕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오래된 주택의 골방이었다. 그것도 사글세로 세 들어 사는. 그랬다. 8년 동안 주식에 미쳐있던 사이 나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아니, 내가 바뀌었다. 수십억 자산을 가진 사업가에서 생활보호 대상자 수준의 서민으로. 그날 밤, 머리 맡 쌓여있는 쌀들을 보며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뭐가 잘못된 거야.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성공가도에 올린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기억의 동굴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컴컴한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잔뜩 웅크린 채 매달려 있던 박쥐같은 기억들이 화르륵 내게 달려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업을 하던 시절의 사소한 에피소드까지 뒤죽박죽 뇌리를 들쑤셨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에 기억이 닿았다. 아버지를 잃고 혼자 식당을 운영하시며 고생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흐느끼며 말했다.

화재로 갑자기 떠난 아버지

4살 무렵, 집에 큰 불이 났다. 불은 세간을 다 태웠을 뿐 아니라 아버지마저 앗아갔다. 우리를 구한답시고 유독한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 킨 탓이었다. 몇 달을 시름시름 앓다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세상에 어머니와 누나, 나, 남동생만 덩그러니 남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하시던 식육식당을 도맡아 운영하셨다. 아침부터 밤까지 여자 혼자 손님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어머니 일을 돕기 시작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가게 문 닫았으니 어머니도 얼른 주무세요.” 아침 6시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가게 문을 닫는 것이 내 몫의 일이었다. 양철 문을 열고 닫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작은 것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철이 빨리 들었던 것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가끔 결혼하기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실이 힘들다보니 생각이 자꾸 과거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리라.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속으로 ‘우짜다 이래 됐습니꺼’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결혼 전과 후가 극과 극이었다. “엄마 고향은 여기가 아니고 합천이라는 곳이야. 엄마 처녀 때 합천에서 엄청 잘나갔지.” 처녀시절의 어머니는 유난히 옷도 잘 입고 미용 감각도 뛰어났다고 했다. 서울에서 미용사를 했었는데 손재주가 남달라 원장님께 예쁨을 받아 종종 보조로 따라 나섰다고 한다. 그 때 만난 사람들이 대단했다고 하셨다. 당시 잘나가는 영화배우 최은희 씨 머리도 만져봤고, 2대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머리도 만져봤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에 미용실이 없었어. 그래서 우리 같은 미용사들을 청와대로 불러서 머리를 하곤 했지. 아무나 못가는 곳이라 얼마나 신기하고 즐거웠는지 몰라.” 그때는 그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잘 몰랐지만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동생들은 몹시 부러워했다. 어머니의 ‘화려한 시절’은 아버지와 결혼을 하면서 끝났다. “너희 아빠 안 만났으면 아직도 계속 했을 텐데. 아무래도 내가 시집을 잘못 온 것 같다, 호호!” 얘기의 끝은 언제나 농담으로 웃으며 마무리하셨다. 어머닌 농담이라며 넘어가셨지만, 나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머리를 손수 잘라주시고, 유창하진 않아도 회화도 가능하겠다 싶을 만큼 영어를 잘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유학적’분위기가 농후한 아버지 집안에 시집오지 않았다면 엄청난 여성 사업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64년생 용띠가 아닌 58년생 개띠로

장남은 부모와 같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그런 케이스였다. 3남매 중 장남으로써 내겐 언제나 공부보다 생계가 최우선이었다.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야간부에 들어가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도장업 아르바이트부터 고층 빌딩 유리를 닦는 일도 했다. 본격적으로 돈을 벌고 싶어 군대도 빨리 갔다. 공군시험을 합격해 공군에 들어갔는데, 장마철 훈련도중에 다리를 다쳐 집으로 돌아왔다. 육군으로 재입대를 해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했다. 군대에 들어가서도 집안 살림만 생각했다. 제대하고 나서도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 기계병에 지원했다. 그 덕에 군 생활동안 기계 관련 자격증을 많이 땄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난관과 맞닥뜨렸다. 손에 기름독이 올랐다. 어느 날 선임하사가 내 손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말했다. “넌 앞으로 기계 만지지 마라! 제대한 뒤에도 기름 만지는 일을 하지 마라. 손 썩는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자격증도 꼬박꼬박 다 따고, 제대 이후의 생계를 마련했다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계독이라니!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식당 일을 도왔다. 몇 달 후 나는 새로운 일을 찾느니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 고기 만지는 일을 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세상에 호락호락한 일이 없었다. 호랑이 같은 선배들이 득시글했다. 이미 30년 이상 이 일에 종사한 잔뼈 굵은 선배들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내게 밥그릇을 뺏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64년생 용띠였지만 58년생 개띠로 위장 아닌 위장을 하고서 아버지뻘인 형님들을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형님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나왔습니다. 잘 가르쳐주십시오.” 도살과정에서 놀라 도망치는 소를 잡아주기도 하고, 칼을 갈아주기도 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형님’들을 도우며 밑바닥부터 차근히 배우기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내게 특별한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성실성과 어릴 적 어머니 옆에서 일찍이 부터 소를 접한 경험이었다. 오랜 세월 소를 지켜보고 만져 얻은 감각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재산이었다. 성실함에 소를 접한 경험까지 더해지니 일 잘하는 비결이 금방 손에 잡혔다. 등지방, 가죽지방을 만지며 논 기억들은 남들보다 좋은 육질의 소를 고를 수 있게 했고, 좋은 육질의 소를 싸게 사들여 잘 팔기 시작하자 돈이 차곡차곡 쌓였다. 남들 1마리 팔 때, 난 3마리씩 팔수 있었다. 형님들은 ‘
요새 애들과 달리 젊은 놈이 쓸 만하다’며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87년 제대 후 92년까지, 5년간 노력 끝에 이 업계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고기유통하면 ‘김영창’을 떠올릴 만큼 나만큼 크게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일에 자신감이 생기고 통장에 어릴 적 생각지도 못했던 큰 액수의 돈이 쌓였다.

엉뚱한 자신감에 나락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일에 자신감이 붙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나는 ‘좀 더 왕창 벌어서 그동안 어머니 고생 더 크게 갚아드려야지’란 욕심에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다.
주식시장은 달랐다. 내가 가진 무기들이 먹히지 않았다. 성실성과 특별한 감각들은 무용한 곳이었다.
97년, 삼성주식만 해도 만(萬)주나 가지고 있었다. 이런저런 회사의 주식을 모두 합치면 당시 가치로는 22억, 지금으로는 60억 정도 되는 돈이었다. 어느 날, H주식이 부도가 날 거란 소문이 돌았다. 급하게 가진 H주식을 모두 던졌다. 3만원 넘게 산 주식을 1300원에 팔았다. 한 방에 몇 십억을 날렸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더 내닫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다. 다시 회복해야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너무 욕심 내지 마라. 돈은 땀 흘린 만큼 버는 게 최고다. 그냥 들어오는 돈은 제 발로 걸어 나간다.” 어머니는 열정을 넘어 광기로 치닫는 나를 보며 타이르듯 말씀하셨지만,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에 수억, 수십억이 끊임없이 날아갔다. 30대에 미리 준비되었던 두둑한 내 노후 자금은 8년 만에 허무하게 날아갔다.

 

“베푸는 만큼 돌아온단다.”

내가 큰돈을 벌려고 발버둥 치던 8년 사이,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는 내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어린 자식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을 때처럼, 어머니는 여전히 식당을 하시며 나를 먹여 살리셨다. 그렇지만 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서 꾸중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지켜보시며 기다려 주셨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신 거였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다시는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정신을 차리자, 소중한 옛 인연들이 나를 도와줬다. 경매자리소개부터 시장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나는 이 또한 어머니의 덕이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내게 늘 말씀하셨다. “어렵게 살아도 착하게 살아야한다. 남에게 베푸는 만큼 돌아온다. 내 것 하나 더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 더 얻는 것이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어느새 내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삶의 철학이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일을 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두루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도와주신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다시 한 번 이를 악 물었다. 나는 새벽 4시에 소를 사서 도축장으로 넘어갔다. 도축장에서 해체작업을 마치면 바로 공장으로 넘어가 고기를 정리한 후, 농협유통 및 우리식당에 가져와 고기를 팔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도 보탰다. 2006년에는 전국 최초로 DM발송을 활용해 전국 판매도 시도했다.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생활이 다시 시작됐지만 힘들지 않았다. 콧노래가 나왔다. 땀을 흘리는 만큼 다시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찾았다. 명성도 다시 찾아왔다. “그래, 이거야. 이 일이 내 천직이야!”

내가 물려받은 가장 소중한 유산, 어머니의 기품

이제 더 이상 큰 돈 욕심은 없다. 어머니가 내게 그랬듯, 나도 내 아이들에게 돈이 아닌 인생의 특별한 무기를 전해주고 싶다. 내 어머니의 품격 있는 삶의 태도다. 세상 어느 어머니든 다 똑같겠지만 우리 어머니만큼 품격 있는 분이 있을까.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귀에 울리는 듯하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사람은 높이 쳐다볼 필요 없다. 자기에게 맞는 눈높이로 세상을 살아가면 평생 아름답게 갈 수 있다. 그것이 인간답게,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현금은 재산이 아니라고. 어머니 말씀이 맞다. 마음이 무너지면 주머니도 뚫린다. 평온한 마음을 지키는 것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재산이다. 누구나 한번은 욕심에 마음이 혹해서 바닥을 치는 날이 오기 마련이니까. “누구나 좋을 때를 보내는 법은 안다. 하지만 힘들 때 극복하는 법을 아는 것이 중요한 거야.” 내 아이들도 어머니의 삶의 태도를 배웠으면 좋겠다. 지금은 아무리 말을 해도 잔소리처럼 여기는 분위기지만, 언젠가는 나처럼 절절한 교훈으로 받아들일 날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어머니가 맡았던 역할을 내가 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처럼 아이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큰 기둥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지난날, 어머니가 내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아직은 아니다. 어머니가 계시니까. 부디 오래 오래 사시면서 나와 내 아이들에게 가장 든든한 언덕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내가 엉뚱한 욕심에 마음고생을 시켜드렸던 그 시절이 후회된다. 하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앞으로 잘 해야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잘해드려야 겨우 ‘보통 아들’이 될 것 같다. “어머니, 오래 사세요. 어머니가 계신 것 자체가 우리 가문의 가장 큰 재산입니다!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 *
정리=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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