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사람] 김민동 아진농산 대표

  • 입력 2016.05.01 00:00
  • 수정 2016.06.03 14:18
  • 기자명 강은주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릴 적 꿈 참농부 이제부터 시작이죠

택시회사 대표 그만두고 농부가 된 남자
모천회귀하듯 땅으로…소농 도우며 쑥쑥

▲ 김민동 아진농산 대표

속되게 한번 물어보자. 택시회사 대표가 나을까, 농부가 나을까. 아마 택시회사 대표가 낫다는 사람이 많을 게다. 개중에는 농부도 농부 나름이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김민동(46) 아진농산 대표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택한 사람이다. 세간의 잣대로는 역선택을 한 셈이고, 재바른 세인의 시각으로는 ‘억대 농부겠거니’ 지레짐작하게 할 일을 한 셈이다. 하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래나 저래나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오해일 수도 있다는 것을. 1960~70년대 가난한 농부들의 원대한 꿈은 드넓은 제 땅을 갖고 떵떵거리며 농사짓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땔감을 하기 위해 언덕배기에 오를 때마다 저 널디넓게 펼쳐진 뻘이 전부 자기 땅이었으면 하고 바라던, 남의 땅 부쳐 먹던(小作農) 전라도 농부의 사연이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유유히 떠돌겠는가. 전라도 농부의 꿈이 이뤄졌는지, 아니 이루어졌는지는 그 누구도 모를뿐더러, 그걸 아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꿈을 가졌기에 배알 뒤틀릴 일 허다했던 소작도 무던히 해냈다는 점이다. 김 대표는 나이로 보아 전라도 농부가 오버랩 되지는 않는다. 대신 기시감(旣視感)은 설핏 다가온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었고 농사의 꿈을 접지 못한 채 거진 반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충남 당진이 고향으로 5남5녀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당진에서도 첩첩산중 산골서 자랐다. 학교까지는 매일 20리(왕복 8㎞)을 걸어 다녔다. 산골소년의 체력은 걷고 달리며 여물어졌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하면서 다져졌다.

대개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한 경험들은 잊기를 원하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땅이 좋았어요. 땅은 땀 흘려 일한만큼 돌려주죠. 기본적인 소득은 보장됩니다. 평생 할 수 있고 생명력도 길지만 문제는 수익이죠.” 당시 충청도 지방의 주된 농사는 잠업이었다. 자연스레 대학에서 연초학(충북대)을 공부했다. 학군장교(ROTC)로 군복무 후 전역했다.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공부했고, 서울의 작은 업체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전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불운을 겪은 김 대표는 31세 되던 해, 대구처녀와 결혼했다. 연고가 없던 서울을 떠나 삶의 터전을 대구로 옮겼다. 자동차부품공장에서 유통운수업을 시작했다. 2001년, 양가의 도움으로 (주)아진택시를 인수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택시회사 대표직을 놓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 겸임할 생각은 없었나.
“2014년 (주)아진농산을 설립하고, 다음해 아진택시 대표이사직을 사임했어요. 제 어릴 적 꿈을 찾아간 것인데, 무슨 미련이나 욕심이 더 있었을까요.” 농사를 지으려면 땅이 필요했을 텐데.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농사지을 땅을 매입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한 텃밭수준이었죠. 수확물이 늘어나자 재미가 붙었어요. 더 많은 땅을 매입했죠. 먹고 남은 수확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아진농산의 탄생기입니다.” (주)아진농산은 경북 의성에 4,900여 평의 직영농장을 물론 1,000여 평의 농산물저장시설을 갖추고 2,000톤의 농산물을 관리한다. (주)농심의 감자칩 원료인 수미감자도 보관·관리한다. 올해부터는 식자재 및 과일을 농민들과 직접수매,계약재배를 통해 대형유통업체에 납품하는 일도 시작했다. 현재 봄배추와 감자를 파종했고 마늘, 양파가 주된 농작물이다.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을 유통한다.
소박한 농부가 대형유통업체 대표가 된거군요.
“작년에 무, 배춧값이 폭락했어요. 농민들은 애써 지은 농작물을 죄다 버려야 할 지경이었죠.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인근의 무, 배추 300톤을 매입하고 창고에 보관했다가 판매했어요.” 김 대표는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참기름세트를 선물한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려갈 참깨를 적정가격에 1.5톤을 사들여 참기름으로 만들어 소비 중이다. 이 때문에 농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됐다. 그는 그럴 때를 “가장 보람된 순간”이라고 했다. 김 대표의 ‘농부의 꿈’은 3년째로 접어들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도와 해 보던 농사와 아버지처럼 해 보는 농사는 다를 수밖에 없다. 50여 년 전 전라도 농부가 꿈꾸던 땅과 지금의 땅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천회귀(母川回歸)하듯 돌아간 땅에서 결실을 거두는 일이 옛 마음과 같던가요. “농업인으로 살아남는 길은 자체 생산, 자체 유통입니다. 우리 회사는 농민들이 생산해낸 농작물을 큰 기업에 납품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영세농의 애로사항을 덜어주려 합니다.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농민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고, 수익의 일부는 꾸준히 사회에 환원하며 나누는 기업으로 성장할 겁니다.” 한편 김 대표 대구시새마을문고 달서구회장, 대구시새마을문고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인재육성재단, 어린이재단 등에 기부하며 아진농산 대표로 한 약속을 성실히 수행 중에 있다. 지난해엔 미스대구 심사위원으로도 위촉되었다.

강은주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