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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안강 노당기와 정문길 대표(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이사장)

  • 입력 2016.04.07 00:00
  • 수정 2016.04.15 09:12
  • 기자명 김성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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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대표도 할아버지가 창업하신 노당기와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된지 확실하게 알수없지만 일제강점기때부터 시작한 기억 밖에 없단다. 세월에 장사가 없다고 그도 이제 아니기 들면서 2003년부터 아들 정병태(44)씨를 제와장 전통장인으로 전수하기 할아버지와 부친에게 배운 제와기술을 고스란히 전수 하면서 함께 일하고 있다. “4대째 내려오는 가문의 기와사랑은 초기에는 먹고살기 위해 무슨일이던 하자고 벌인 일이지만 이제는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과 문화계승을 위해 하는 필연으로 생각합니다.” 정 대표가 기와에 손을 댄 것은 중학교를 각 졸업한 열칠곱 부터다. 온식구가 모두 기와 만드는 일에 매달려 아홉 개의 전통가마(두꺼비가마)를 식구들이 수작업으로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밤새워 민든 흙가마가 굳기도 전에 바람에 부서지면 새벽녘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만들었다. 윗대부터 해온 일이라 힘들어도 포기할수 없는 일이었다. 어린 정 대표는 힘든 기와제작에도 가마에 기와를 넣는 작업은 소망과 정성을 담는 불탑을 쌓는 과정이라 스스로 위안하면서 묵묵히 대를 이어왔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녹록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른 일을 기웃거리다가도 기와에 마음을 다잡을 시기인 1967년 당시 새마을운동으로 만들기 쉬운 서양기와의 물량 공세와 콘크리트 건물의 범람으로 전통기와는 이내 사양길로 그 많던 전통 가마들이 한 두 곳씩 문을 닫았다. 당시 안강 일대 7개의 기와공장중 노당기와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 대표의 부친은 위기가 기회다는 신념과 전통기와의 맥을 누군가는 이어가야 한다는 신조로 문을 닫은 공장들을 오히려 하나씩 어렵게 사들이면서 꺼져가는 전통기와의 불씨를 살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정 대표는 부친의 장인정신에 감동하면서 기와의 맥을 찾아 이론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하고 긍정적인 사고로 기와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가회는 찾아왔다. 기와공장 인접 강동면 양동 민속마을을 비롯한 안강일대 옥사서원, 소수서원을 비롯해 불국사 등 지역내 전통사찰과 서원 등지에 문화재 복원사업이 붐을 이뤘는데 역시 이곳에는 옛것과 같은 우리나라 전통 기와가 필수였다. 그에게는 인생 최대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그저 만들어진 운수에 그치
지 않고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항상 갖고 전통 기와의 장점을 연구하고 나름대로 개발해 발로 전국을 뛰어다니며 지금의 ‘노당기와’를 지탱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힘겨운 제와공의 길을 걸으면서 몇 번이나 좌절의 시련을 맞아야 했던 그가 이제 전국문화재에 관련된 기능인 7743명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유일의 문화재기능인협회회장의 자리에 앉은 것은 힘겨운 삶의 보상이 아니라 분명 어린 정 대표의 눈에 비친 할아버지와 부친의 삶의 전부였던 전통기와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애환의 연장이다. 정 대표는 “옛 가마터가 속속 발견되고 우량 토질로 마을 곳곳에 가마들로 성업을 이루면서 예로부터 기와와 인연이 깊은 노당리에서 과학적인 전통기와의 맥을 이어면서 임기동안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을 위한 보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성웅기자 k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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