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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 보리가 팰 때쯤

  • 입력 2016.04.04 00:00
  • 수정 2016.04.05 17:17
  • 기자명 정광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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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수

▲ 이달의 시 작가 변희수씨.

내가 태어난 날을 물어보면

인디언족처럼 엄마는 보리가 팰 때쯤이라고 한다

보리가 팰 때쯤이란 말은 참 애매하다

보리의 배가 점점 불러올 때나

보리의 수염이 까끌하게 자랄 때로 들린다

그때 그 보리밭에서 …….

이런 우스운 생각을 하다보면

보리가 떨군 씨앗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철없이 들뜰까봐

언 땅에 떨어진 보리를

자근자근 밟아주던 소리

엄동에 어린뿌리 자장자장 재우던 소리

내 유년에 푸른 젖을 물리던

먼먼 전설 같은 춘궁의 족보

젖니처럼 간질거리는 봄날

스르르 눈꺼풀이 풀린다

 

시인소개

변희수는 1963년 경남밀양에서 태어나 영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2011년 시 ‘아주 흔한 꽃’으로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했다.

2016년 ‘의자가 있는 골목’으로 경향신문신춘문예에도 당선했다. 한국시인협회 정회원으로 대구에서 시작 활동 중이다.

해설 제왕국 시인

수십 년 전만 해도 시골은 저랬다. 저 전설 같은 춘궁의 족보를 기억의 허니문처럼 가지고 산다.

보리가 필동 말동 무렵, 달빛 보늬처럼 아슴푸레 떨어지는 늦은 밤에 푸르른 청춘들이 다녀갔다. 보리밭에 독 오른 푸른 청춘들이 다녀가면 거짓말처럼 보리침대 하나 생긴다. 보리밭 주인 싱긋 웃으며 눈감아 주던 그 봄날의 까시랭이 같았던 우리들의 이야기 한 소절로 가가대소했던 시골전경 눈에 밟힌다.

입안에서 까끌까끌 맴돌기만 했던 꽁보리밥, 입맛이 아니라 배고픔에 먹어야 했던 아찔한 춘궁의 봄.

하필 보리였을까? 달착지근한 나락 같은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그 보리가 있었기에 우리의 봄은 아프지만은 않았다.

한데 지금은 그 보리가 시골에서 퇴출된 지 오래다. 호사가들에게 무척 귀여움 받는 귀하신 몸이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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