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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민뷰티샵 이민주 원장 - 나의 어머니

  • 입력 2016.03.30 00:00
  • 수정 2016.03.31 11:48
  • 기자명 김민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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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주 민뷰티샵 대표 원장

이민주 민뷰티샵 대표 원장

‘엄마와 함께 그려가는 내 인생’

‘나는 공부 열심히 해서 망한 케이스였다’

고2 올라올 때만 하더라도 중하위권 성적이었다. 미대를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공부는 뒷전이었다.

고2 1학기가 다 끝날 무렵 미술 학원에서 만난 친구가 이렇게 조언했다.

“미대도 좋은 델 가려면 성적도 중요해. 그림만 잘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래.”

미대를 가려고 마음 먹었으면서도 입시 요강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그날부터 공부에 매진했다. 처음으로 코피가 날 때까지 공부했다. 그러자 꿈쩍도 않을 것 같은 성적이 들썩대기 시작했다. - 그것도 고3 때에! 팔공산 갓바위를 한손으로 들어 올리는 기분이었다. 급기야 모의고사 성적이 140점 이상 수직상승했다.

“너 족집게 과외 받냐?”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다.

▲ 어린 시절 유독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어린 시절 유독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 ‘미대? 턱도 없는 소리하지 마라’

“엄마, 이번 모의고사 성적표야.”

어머니에게 성적표를 당당하게 내밀었다.

“엄마, 이 정도면 경북대학교 미대는 충분하대.”

그 순간, 성적표를 받아들고 환하게 웃던 어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야가 무슨 소리 하노! 미대는 무슨 얼어 죽을 미대고!”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반응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미대는 절대 안 된다. 미대 갈 거 같으면 아예 학교 가지 마라! 그림은 네 아빠로 충분하다. 미대라는 말도 꺼내지 마라. 우리집은 미술 때문에 망했다!”

사실 엄마가 미대 진학을 반대하는 이유는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세 자매를 남기고 일찍 돌아가셨다. 당시만 해도 남자 없는 집에서 딸 셋을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시장 좌판부터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포목 장사를 해서 어머니와 이모들을 먹여 살렸다. 다행히 장사가 잘 돼 어머니는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좀 사는 집 딸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당시로써는 귀하게 자랐다.

▲ 초등학교 때 온 가족이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가서 한 컷

초등학교 때 온 가족이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가서 한 컷

하지만 22살에 아버지와 결혼 후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화백이셨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림에 빠졌다. 엄마가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남편만으로도 미술에 신물이 난 어머니였다. 딸이 또 붓을 잡겠다고 나섰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는 고집을 피웠다. 엄마는 등록금을 못 준다는 엄포부터 ‘부모·자식의 인연을 끊자’는 협박까지 서슴치 않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미대 입학을 준비를 했다. 자취하며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 계획도 세웠다.

# 나도 모르게 합격한 간호대

혼자 미대입시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민주야, 너 간호대 특차로 합격했다. 엄마가 오셔서 직접 원서를 내셨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당시는 특차에 합격하면 다른 곳은 원서도 못 냈다. 미대에 입학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치도록 공부했는데, 결론은 생각지도 않은 간호대였다.

“엄마 이종사촌 딸이 간호사인데 전문직이고 오래 하면 월급도 많다더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엄마의 말에 나는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왜 내 인생을 엄마 마음대로 하는데! 왜 엄마 마음대로 하느냐고!”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태어나서 그만큼 울어본 적이 없었다.

 

# 이 길은 내 길이 아닌데....

간호대 입학식 때도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집에서는 잠만 잤다. 간호대 과정은 마치 수용소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강의실까지 30분은 족히 걸렸다. 4년간 학교에 다니며 거의 매일 ‘내 길이 아닌 곳을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간호대 특성상 학습량이 많은 것은 물론, 규율도 엄격했다. 점점 학교에 흥미를 잃었다. 수업을 빼먹는 날도 많았다.

축제기간에 시내에 갔다가 메이크업을 하는 이들을 봤다. 당시에는 메이크업이 생소했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무엇인가 홀린 듯 메이크업학원에 등록을 했다. 학원비는 내가 벌었다.

수업을 마치면 바로 메이크업학원에 갔다. 몸이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집에는 항상 자정이 다 되어 들어갔다. 엄마는 내가 학업에 열중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생활이 바빠진 만큼 엄마와의 대화는 물론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부지런히 외도(?)를 한 덕에 졸업앨범을 찍을 때 친구들이 나에게 메이컵을 받겠다고 줄을 섰다.

졸업 후 엄마의 뜻을 따라 대형병원에 취업했다. 그때도 여전히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퇴근 시간이면 항상 나를 태워서 집으로 왔다. 30분 정도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대화가 거의 없었다.

 

나의 첫 근무처는 중환자실이었다. 근무를 할수록 ‘내 길이 아니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중년의 재력가가 암 선고를 받고 입원했다. 그는 “부모의 반대로 음악을 포기하고 살아온 것이 한이 된다”면서 병실에 악기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그를 보면서 ‘후회하는 삶을 살기 싫다’는 생각에 한동안 손을 놓았던 메이크업학원에 찾아가 등록했다.

학원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저축은 고사하고 한 달 월급을 메이크업과 학원비로 다 쏟아부었다. 항상 피곤한 얼굴에 점점 살이 빠졌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정말 편했다. 내친 김에 친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나를 찾는 손님이 점점 늘었을 무렵 병원에 사표를 냈다. 물론 집에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병원에 근무하는 것처럼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맞추었다. 한번은 엄마가 병원 앞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허겁지겁 병원으로 들어나 퇴근하는 것처럼 연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너 정신 나갔나! 당장 집에 들어온나, 퍼뜩!”

결국 들켰다. 병원에 전화를 했다가 내가 퇴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나는 겁이 나 집에 못들어가고 샵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한 달 가량 시간이 지나자 다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차마 미용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병원을 그만뒀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쉬고 싶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핼쑥해진 내 얼굴을 보고 더 이상 야단을 치지 않았다.

 

#부모님 몰래 뷰티샵 개원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계속 취직을 하라고 종용했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갔더니 내 발앞에 선풍기가 떨어졌다. 날개가 산산이 조각났다. 아버지가 폭발한 것이었다. 그 즈음 부모님의 눈에 비치는 나는 할 일없이 놀고 먹으면서 취미생활(메이크업)을 하는 딸이였다. 엄마는 회초리를 들었다.

“네가 정신이 있나 없나, 지금 뭐하는 짓이고. 멀쩡한 직장은 왜 그만두고 이러고 있나?”

아프다는 생각보다 엄마의 그런 모습에 오기가 생겨 피하지 않고 맞기만 했다. 한참을 맞다 보니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서러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엄마 때문에 내 인생 완전히 망했잖아. 나 미대 간다고 했을 때 보냈으면 지금 이렇게 안 됐잖아. 내 인생 책임져!”

갑작스러운 반항에 부모님은 멍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음 날, 나는 부모님 몰래 뷰티샵 할 곳을 물색했다. 쥐꼬리 만한 퇴직금을 가지고 대구 수성시장 골목 끝에 있는 7평짜리 가게를 구했다. 주인은 보증금 200에 20만 원을 내라고 했지만, 그 돈도 없었다. 한참을 설득한 끝에 월세 25만 원에 보증금을 100만원으로 합의를 봤다. 하지만 오픈하는데 2,000만 원 가까이 들었다. 시작과 동시에 빚이 생겼다.

점심값도 없어서 인근에 사는 친언니가 도시락을 싸왔다. 전기세가 아까워 마지막 손님이 남았을 때는 간판 불을 껐다. 집으로 갈 택시비를 아끼려고 한 겨울에 매장에서 전기장판을 깔고 잔적도 많았다.

반년이 지나자 손님이 점점 늘었다. 언니도 합류했다. 그무렵 엄마는 언니를 통해 내가 샵을 차린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전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자존심 때문에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손님은 많았으나 초기에는 돈이 안 돌아 애를 먹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초기에는 시설투자비와 재료비 등 지출할 것이 너무 많았다. 재료상에 결제도 미루는 것이 관례였지만 나는 매달 현금으로 결제를 꼬박꼬박 해주다 보니 현금이 없었다.

당장 100만 원도 없어 빌리려고 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빌릴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언니를 통해 엄마에게 돈을 빌리려고 했다. 엄마의 대답은 NO였다.

‘그럼 그렇지.’

나도 자존심 때문에 더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열심히 한 덕에 손님은 점점 늘었다. ‘솜씨 있는 간호사 출신의 원장이 꼼꼼하게 잘 하는 샵’이라는 소문이 났다. 일 년이 되어갈 무렵 언니와 나는 더 이상 재료비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만큼 매출이 늘었다. 가게를 확장하자 언니는 엄마를 모셔와서 눈썹 문신을 해드리라고 했지만 나는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다.

어느 날 숙모가 눈썹 문신을 하러 왔다. 베드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가 네가 하도 잘한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났다. 숙모가 간 뒤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가 말했다.

“가게는 잘 되나?”

더는 말이 없었지만, 그 한마디에 묵은 감정이 사그라졌다. 다음날 엄마가 가게로 왔다. 한참을 둘러보다가 봉투를 건넸다.

“그때 돈 빌려달라고 했을 때 네가 오면 주려고 했던 돈이다. 어차피 네 돈이니 가져라.”

봉투 안에는 일 년치가 넘는 월세가 들어있었다. 엄마가 돌아간 뒤 울었다.

며칠 후 가계 셔터를 내리는데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여전히 차 안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하지만 예전의 냉랭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원망이 눈 녹듯이 사라진 후였다. 그날 이후 엄마와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전처럼 가까워졌다. 엄마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고 내가 힘들까봐 보약을 지어줬다. 엄마가 샵 원장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 갑자기 내려진 암 선고

“어머니 어디 아프신 거 아냐? 살이 갑자기 너무 빠졌어.”

단골손님 하나가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몇 달 새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병원에 다녀온 엄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민주야 큰 병원 가보라 하네.”

경북대학교 병원에서 ‘간암 말기’라는 상상치도 못한 선고가 내려졌다. 수술밖에 방법이 없다는 말에 수술날짜를 잡았다. 그러나 수술 바로 전 상태가 너무 않 좋아 수술실에서 다시 나와야만 했다.

병실로 돌아온 엄마는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누워있는 엄마를 보자 10여 년간 엄마를 원망했던 내가 너무 미웠다. 10여 년 만에 엄마의 손을 잡아봤다. 이제야 자리를 잡아 엄마와 잘 지내려고 했는데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다.

‘엄마 수술 만 잘 된다면 다시 간호대학 입학이라도 할게요.’

정신이 든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괜찮다. 안 된다 카는 걸 우짜겠노. 그래도 우리 민주 이렇게 성공한 거 봤잖아.’

하루하루 약해져 가는 엄마를 보던 중 희소식이 들렸다. 임상 약으로 치료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효과는 검증되었지만, 부작용이 없다는 장담을 할 수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 식구는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입원 중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좀 아프고 지친다’는 말을 했다. 엄마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참 낯설게 느껴졌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임상약을 먹은 후 엄마는 놀랍게도 완치 판정을 받았다. 여러 명이 함께 복용했는데 엄마에게는 약이 잘 맞았다.

“다행히 약이 잘 맞았네요.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아요. 퇴원해도 좋습니다.”

담당의사의 말에 우리 가족은 얼싸안고 울었다. 퇴원하는 날 엄마 대신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느낄 수 있었다.

건강을 회복한 엄마는 가끔 이야기한다.

“병원에 있을 때 내가 가장 후회한 게 네가 돈 빌려달라고 할 때 안 준 거였다. 난 네가 찾아와 주길 바랬는데····. 네 고집도 참 대단하다. 아무튼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아빠가 못한 걸 네가 이뤘으니 말이다.”

엄마가 퇴원하자 신기하게도 뷰티샵에 손님이 급격히 늘었다. 퇴원 후 한동안 엄마가 샵 일을 도와주었다. 손님이 많아지자 수성구 가게는 언니에게 넘기고 나는 동성로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개원을 기다렸다는 듯 손님이 물밀 듯 밀려왔다. 나는 재료상 업계에서 재료비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으로 소문났다. 요즘에도 가끔 엄마랑 같이 퇴근을 한다.

어느 날, 차 안에서 엄마가 말했다.

“고3 때 니가 미술 한다고 고집 피웠을 때 너까지 그림 때문에 망하는 줄 알았다. 그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지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미대를 보낼 걸 그랬네, 호호호!”

나는 웃으며 맞받아친다.

“그럼 지금이라도 미대 다시 갈 테니 등록금 보태줄래?”*

정리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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