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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 충실… 풍기인견 르네상스 견인차

3대 100년 기업 풍기인견 산 역사 삼화직물

  • 입력 2016.02.11 00:00
  • 수정 2016.02.16 11:28
  • 기자명 이용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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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삼화직물 임직원들이 부석사 야유회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삼화직물 제공
▲ 삼화직물 차대영 대표가 직물공장에서 생산한 인견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경북 영주는 풍기인삼과 함께 나무에서 뽑은 실로 천을 짜는 풍기인견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풍기인견을 짜는 공장이 한때 200곳을 넘을 정도로 인견은 영주의 주력산업으로 부상했지만 화학섬유의 발달 등으로 쇠퇴를 거듭하다가 최근 친환경 소재라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삼화직물은 풍기인견의 부침 속에서 3대 60여 년간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풍기인견은 나무(펄프)에서 추출한 섬유를 실로 만들어 천으로 짠 것이다. 천연섬유로 가볍고 시원하며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되며 착용시 상쾌한 느낌을 준다. 땀 흡수력이 탁월하고 정전기가 전혀 없어 냉장고섬유, 에어컨 섬유로도 불린다.

풍기인견은 풍기인삼과 함께 한국전을 전후로 대거 이주해 온 한강 이북 주민들에 의해 성장했다. 난세에 몸을 보전할 최적지라는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제1의 장소가 풍기읍 금계리에 있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말부터 이북 주민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자본과 기술이 풍부한 개성 인삼상인들이 인삼재배의 원조 풍기에서 다년생 인삼재배에 나섰고, 명주의 고장인 평안도 영변 덕천 등지서 남하한 직물기술자들이 발로 디뎌 짜는 족답기베틀로 인견산업을 꽃피운 것이다. 하지만 면이나 화학섬유와 달리 부드러운 성질이 없어 옷을 만들 때 맵시를 내기 어렵고 염색 때 화려한 색감을 살리기 어려우며 습기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풍기인견은 이 같은 단점을 극복하고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차대영(46) 삼화직물 대표는 “품질 좋은 제품은 좋은 자재와 디자인 등 본질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며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며 기본에 철저한 경영철학을 소개했다.

한국전 직후 족답기 1대로 창업

삼화직물은 평북 영변이 고향인 고 차준헌 창업주가 40세가 되던 1953년 풍기에 정착하면서 시작했다. 북한에서 이주한 직물기술자들이 명주공장 등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직조와 유통경험을 가진 그도 족답기 한 대로 인견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가내수공업이었지만 전쟁 직후 원단이 귀하던 시절이라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서울 남대문시장과 평화시장 등에 고급양복 안감지로 팔려나갔다. 공장 앞에는 원단을 구하려는 유통업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30∼40명의 직원들이 밤낮없이 족답기를 밟아도 주문량을 맞추기 힘들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1980년대까지 풍기읍내 골목마다 200여 공장에서 내는 기계음은 요즘 같으면 소음공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내실경영에 주력한 2대

1974년 창업주의 아들이자 현재 차대영 대표의 부친인 차동일이 가업을 물려받았다. 13살 때 창업주의 손을 잡고 월남해 30대 후반에 가업을 잇게 된 것이다. 창업주는 가업을 물려준 지 8년만인 1982년 작고했다.

그는 외형을 키우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기술개발에 주력해 1980년대 중반에 직조기를 수동식 족답기에서 반자동기계로 교체했다. 안감용 의류 생산을 넘어 화려한 색상의 조화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풍기인견도 88올림픽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맞춰 입던 양복 대신 기성복이 일반화하고, 안감은 값싼 화학섬유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기술의 발달로 화학섬유의 치명적 단점인 정전기 방지 가공기술이 개발됐기 때문이다.

2000년대부터 웰빙바람 타고 승승장구

1990년대 풍기인견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다. 삼화직물도 명맥만 이을 뿐이었다. 차대영 대표는 서울에서 따로 건축자재사업을 했다.

그대로 끝날 것 같은 풍기인견은 2003년쯤부터 웰빙바람을 타고 부활하기 시작했다. 식물성 천연섬유로 알레르기나 아토피 등에 좋고 착용감이 상쾌하다는 점이 의류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염색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색상을 낼 수 있어 단순한 양복 안감에서 겉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차 대표는 2008년 부친이 작고한 뒤 가업을 승계, 명품 인견을 만들기로 했다. 3대 초기엔 원단생산에 주력하다가 최근에는 침구류와 숙녀복, 아동복, 속옷 등 완제품에 도전, 성과를 거두고 있다. 봉제는 외부 전문업체에 맡겼다. 소담스러운 비단이라는 ‘소담비’라는 독자 브랜드도 만들었다. 전국 백화점 3곳과 200여 대리점을 통해 팔려나가고 있다.

올해는 공장 내의 판매점을 새로 확장해 짓고 2층에는 날염(나염, 섬유에 부분적으로 착색해서 무늬가 나타나게 하는 염색방법)을 직영하는 등 공격적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삼화직물은 2010년 지금의 영주지방산업단지로 판매장을 겸한 공장을 옮겼다. 풍기인견이 다시 호황기를 맞이한 것이다. 2008년 25개 인견업체와 함께 풍기인견발전협의회를 구성하고 2012년 지리적표시 단체표장 등록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2013년에는 경상북도 향토뿌리기업에 선정됐다.

이용호기자 ly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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