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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철맨들의 터전.. 세계 3번째 빛 가속기 품고 첨단산업 요람으로

신한국견문록<73> 포항 지곡주택단지

  • 입력 2016.02.11 00:00
  • 수정 2016.02.19 18:18
  • 기자명 김정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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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근로자 주거지로 조성 990만여㎡ 부지에 7000가구 생활

복지, 교육 모두 유럽 수준 겨냥

소련 고위인사 “사회주의 이상 실현”

美日 이어 4세대 방사광가속기 완공

분자 단위 관찰 가능한 거대 현미경

세계적 학자 몰리는 연구 거점 부상

▲ 포항 지곡주택단지 전경. 왼쪽편은 포항공과대학과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이 들어서 있고 뒤편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건설된 방사광가속기와 공동주택 단지가 자리잡고 있다. 포스코 제공.

과거 포항제철 근로자의 주거지 마련을 위해 건설된 경북 포항 지곡주택단지가 굴뚝 없는 첨단산업단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탁월한 주거 환경과 포항공과대학교를 품은 교육도시로 알려진 이 곳은 최근 방사광가속기 등 세계 유수의 연구개발시설이 들어서면서 포항 지역은 물론 앞으로의 국가 미래를 이끌어 갈 요충지로 주목받고 있다.

포항 남구 지곡동 지곡주택단지는 990만여㎡(100만평)부지에 단독주택과 아파트를 합쳐 7,000여 가구가 입주해있다. 1972년 조성됐지만 도로변에는 흔한 전화선이나 전기선을 볼 수 없다. 전국 최초로 지하공동시설을 갖춘 덕분이다.

단지에 처음 발을 들이면 누구나 눈이 휘둥그래진다. 숲 속에 온 듯 착각할 만큼 울창한 조경과 녹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전봇대 하나 없는 거리가 1970년에 조성됐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란다. 포스코가 단지 개발 단계부터 야산의 기존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리고 대형 수목을 심어 철저히 가꾼 덕분이다. 봄이 되면 만개한 벚꽃으로 단지 전체가 마치 눈이 온 것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옛 소련 외교아카데미 부원장 유진 바자노프 부부도 단지를 둘러본 뒤 “막스와 레닌이 추구해 온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다.

포항 지곡주택단지는 포항제철을 세운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야심찬 계획 아래 건설됐다. 포스코 경영비사에 따르면 1968년 당시 박 회장은 국제제철차관단의 자금이 막혀 직원 월급도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지곡단지 건설을 강행했다.

 

부지 물색에 들어간 박 회장은 포항제철과 가깝고 공동묘지의 야산이 많아 땅값이 비교적 저렴한 지곡동을 택했다. ‘묘가 많아 꺼림칙하다’는 주변의 만류에 박 회장이 “조상들이 양지바른 명당에 묘를 쓰는 걸 모르냐”며 반박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 회장은 지곡주택단지 건설에 돈과 시간, 인재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종 나무를 심었고 숲마다 산책로를 내며 인공 연못 설계를 지시했을 정도로 조경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내외 내빈들과 외국 기술자들의 숙식 문제를 해결할 호텔로 영일대와 청송대, 백록대를 지었고 쇼핑센터와 공연장, 체육관까지 배치했다. 1990년 기존 지곡주택단지를 확장해 신단지를 추진할 때는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에 사업을 맡겼고 당시 대한주택공사 직원들을 물색해 과감히 채용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포항 지곡주택단지를 사원주택지로 건설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계획에는 유럽 최고 수준을 능가하는 전원단지와 교육단지를 만들겠다는 마스터플랜이 그려져 있었다. 박 회장은 야심대로 유치원과 초, 중, 고교에 이어 세계 명문대 수준의 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그렇게 문을 연 대학이 미국 칼텍(캘리포니아공과대학)을 모델로 삼은 포항공대였다. 이어 박 회장은 포항제철의 기술 개발을 책임질 상용화 연구기관인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과 세계에서 5번째로 방사광가속기 건설을 이끌어냈다. 포항공대에는 박 회장의 노벨상 수상자 배출의 염원을 담은 노벨동산이 조성돼 있어 이 학교를 방문한 이들이 꼭 둘러봐야 하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 포항제철을 둘러보기 위해 포항을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포항 지곡주택단지 내 영빈관인 영일대 호텔 마당에 도착해 내리고 있다. 포스코 제공.
▲ 포항지곡주택단지 내 외국인숙소로 건립됐던 영일대호텔은 현재 민간에 위탁 운영되고 있다. 포스코 제공.

지곡주택단지의 자랑거리는 포항공대를 비롯해 포스코의 탄탄한 재정으로 유지되는 교육환경에 있다. 유치원에서 초ㆍ중ㆍ고교까지 모두 사립학교지만 수 십 년간 포스코의 지원 아래 국내에서 가장 수준 높은 교육 시스템을 갖췄다는 평가다. 덕분에 지곡단지는 포항 부동산 시장에서 비싼 편에 속한다. 단지 초입에 위치한 포항 남구 대잠동 일대 단독주택 가격은 도심지의 2배가 넘는다. 단지 내 주택은 포스코에서 나오는 폐열로 난방을 해결, 공동주택 관리비가 저렴한 것도 높은 집값의 비결이다.

지곡주택단지는 최근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완공되면서 더 주목 받고 있다. 꿈의 빛이라 불리는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가속시켜 빛을 발생시키는 빛 공장이자 이 빛으로 단백질 같은 생체 분자구조를 볼 수 있는 거대 최첨단 현미경과 같은 대형 시설이다. 지난해 말 준공된 직선형의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대지면적 12만620㎡, 건물 연면적 3만6,764㎡에 길이만 해도 1.1㎞에 달한다. 가속기 건물이 워낙 길고 크다 보니 직원들이 시설물을 살펴볼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다. 건설비용만 해도 국비 등 4,26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방사광 가속기는 생체나 세포를 자르지 않고도 암세포 등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도 있어 신약 개발이나 신물질, 신소재 등 첨단과학 연구나 첨단산업 육성에 활용할 수 있다. 단지에는 이미 지난 1988년 박 회장의 지시로 세계에서 5번째로 건설된 원형의 3세대 방사광가속기가 가동되고 있다. 국내에서 이뤄진 연구 가운데 사이언스나 네이처 등 해외 주요 과학 학회지에 표지 논문으로 게재된 상당수 논문이 이 가속기를 이용해 결과물을 얻어냈다.

가속기를 가동하려면 건설비용도 많이 들지만 운영비용도 천문학적이다. 3세대 방사광 가속기도 연간 전기요금만 40억원이 넘는다. 워낙 돈이 많이 들어가는 대형시설이다 보니 세계적으로 가속기를 보유한 국가도 미국 등 일부 선진국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 연구에 꼭 필요한 시설이지만 나라마다 자국민에 우선 사용권을 주는 탓에 국가 간 공유가 되지 않는다.

▲ 포항 지곡주택단지 내 있는 방사광가속기. 오른쪽 원형 모양의 건물이 세계에서 5번째로 건설된 3세대 방사광 가속기이고 왼쪽의 긴 막대 모양의 건물이 미국와 일본에 이어 3번째로 건설된 4세대 방사광 가속기이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제공.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가 되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3세대 방사광가속기 바로 옆에 건설됐다. 앞으로 1년간 시운전을 거쳐 본격 가동되는데 태양보다 100경 배 밝은 빛으로 1,000조 분의 1초에 불과한 분자의 움직임을 촬영할 수 있어 물리, 화학 등 기초연구에서부터 신약 개발 등 응용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4세대 방사광 가속기는 앞서 가동되는 3세대 방사광가속기와 함께 지곡주택단지를 첨단산업 육성과 국가과학기술 경쟁력 강화의 중심지로 바꿀 전망이다. 더구나 인근 포항공대 등 대학의 우수한 인재, 단지 곳곳에 산재해 있는 연구개발기관인 막스플랑크 한국 연구소, 아태이론물리센터, 로봇산업진흥원, 나노기술직접센터 등과 단지 내 기업지원시설인 포항창조경제센터, 포항테크노파크 등이 뭉치면 시너지효과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포항시도 지곡주택단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3세대 방사광가속기를 사용하기 위해 지금도 전 세계 각지의 연구원과 학자들이 포항을 찾고 있다. 시는 완공 후 현재 시운전 중인 4세대 방사광가속기의 1년여 시험 기간이 끝나면 지곡단지에 더 많은 기업과 연구기관 직원들이 발걸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올 6월에는 4세대 가속기 바로 옆에 가속기체험관과 이용자 숙소가 건립된다.

이기권 포항시 창조경제국장은 “지곡주택단지는 세계적인 철강 경기 침체로 위기를 맞은 포스코와 포항에 희망의 땅이다”며 “과거 포항제철이 포항과 국가 발전의 성장 동력이었다면 포항제철로 탄생한 포항지곡주택단지가 앞으로 포항은 물론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미래를 이끌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포항=김정혜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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