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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특집 나의 아버지 - 남상걸 유네스코 대구협회 회장

잿더미가 된 집, 망치를 잡아본 적도 없던 아버지는...

  • 입력 2015.12.02 00:00
  • 수정 2015.12.03 09:35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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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걸 유네스코 대구협회장./2015-12-02(한국일보)

나는 겁도 없이 칼날 위에 올라섰다. 1981년 봄, 내 나이 삼십 대 초반에 고향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선전은 했다. 후보 7명 중 2명을 뽑는데 3등을 했다. 내 고향인 청송에서는 표를 50% 가까운 득표를 해서 여당 후보를 깜짝 놀라게 했다. 청송과 비교할 때 영덕은 인구수가 2배, 울진은 3배였다. 고향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결국 이웃 지역에서 실패해 미역국을 마신 셈이었다.격전지는 청송, 울진, 영덕이었고 여당 강세가 확실한 지역이었다. 나는 야당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낙후된 고향을 조금이나마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국민당 부총재로 있던 이만섭 선생이 정치 입문을 권유했다.

선거 전에 조금 더 일찍 뛰어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요즘도 가끔 든다. 20일 전에 후보 등록을 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선거 운동을 한 것 치고는 득표가 만만찮았지만 대세는 극복하지 못한 거였다.

선거가 끝나고 진짜 고생이 시작됐다. 슈퍼, 양조장, 식당 등에서 청구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막걸리 선거였다. 선거 운동원들이 내 이름을 대고 돈을 써댄 것이 결국 나의 빚이 된 거였다.

여당에서도 압박이 들어왔다. 선거 기간 중에 워낙 정부 비판을 많이 한 까닭이었다.

그 결과는 엄혹했다. 은행에서 “대출금을 일시불로 갚으라”고 요구했다. 그럴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은행은 ‘공매처분’ 결정을 내렸고 결국 공장이 날아가 버렸다. 나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밖에 나가려고 해도 차비가 없었다.

“어떻게 일군 사업인데…….”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대구로 나와 섬유업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이른바 리즈 시절(잘 나가던 한때)이 꿈처럼 느껴졌다. 나는 집안에 틀어박혀서 지난날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달리 할 일도 없었다.

# 밥 세 끼 실컷 먹고 싶은 마음에 고향 떠나...

나는 철들 무렵 고향 청송을 떠나 대구로 왔다. 청운의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삼시세끼 양껏 먹어보고 싶어서”였다. 우리 집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다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아버지가 낫을 가는 모습이 생각난다. 슥삭 슥삭 정성스럽게 낫날을 벼린 후 볏단 하나를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으앙!”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생이 태어나는 광경이었다. 면 소재지도 멀었고 산파를 부를 형편도 못 됐다. 그렇게 아버지가 나의 다섯 동생들을 직접 받았다.

우리가 유독 가난했던 건 아니었다. 전쟁 직후라 다들 힘들었다. 보리밥이라도 먹으면 부자 축에 들었다.

보릿고개가 되면 아버지는 소나무를 잘라왔다. 낫으로 껍질을 벗기면 진득한 것이 묻어나왔다. 송기였다. 입에 넣고 씹으면 단맛이 났다.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배급을 줬다. 교장선생님 사택에서 밥을 지었는데, 솥뚜껑을 열 때의 그 구수한 냄새가 지금도 코끝에 확 풍기는 듯하다. 우리는 그 솥에서 퍼낸 밥으로 만든 주먹밥을 하나씩 받아들고 집으로 왔다. 배가 너무 고팠지만 나는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왔다. 물론 아주 안 먹었던 건 아니었다. 식욕을 억제하려고 한 알씩 뜯어 먹었다. ‘한 입만 먹고 가자’하고 생각하면 결국 다 먹게 된다. 한 알씩 먹으면 반 이상 남길 수가 있었다. 주먹밥을 집에까지 가지고 간 이유는 할머니와 나누어 먹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일이지만 큰아버지가 계셨는데도 할머니는 늘 우리 집에서 지내셨다. 제사 때도 큰어머니가 오지 않았다. ‘어린’ 내가 모르는 어른들끼리의 사연이 있었던 듯하다.

무엇보다 우리 집이 마음이 편했던 듯하다. 아버지는 둘도 없는 효자였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일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다. 할머니가 병으로 누워 지내셨다. 겨울 즈음이었는데 아버지가 나무 하러 갔다가 꿩을 한 마리 잡아오셨다. 그 꿩을 잡아서 고아 드렸더니 몸이 훨씬 나아졌다. 아버지가 이런 고백을 했다.

“며칠 전에 꿈을 하나 꿨어. 산신령이 나타나 어머니에게 꿩을 한 마리 잡아서 고아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 이러시는 거야. 다음 날 아침에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데 어디선가 퍼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라. 가보니까 큰 꿩 한 마리가 올가미에 걸려서 퍼덕거리고 있더라고. 이 꿩이 바로 그 산신령이 말씀하신 놈이구나 싶어서 집으로 가져왔지.”

형님 대신 어머니를 모시고 큰집 장조카까지 한 식구로 있었지만 아버지는 불평 한번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와도 잘 지내셨다. 나는 이제껏 두 분이 다투시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늘 둘 만의 비밀이라도 나누는 듯 소곤거리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마음만은 편했던 이유였다. 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 6.25 피난서 돌아오니 살던 집은 잿더미로...

우리 가족에게 가장 큰 고비는 6.25였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에게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전쟁이 나던 해 내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 등에 바짝 붙어 있어라.”

아버지는 등짐을 진 뒤에 그 위에 나를 태웠다. 그렇게 식솔을 이끌고 밤새도록 산길을 걸었다.

우리 가족은 어느 폐광을 은신처로 정하고 그 안에서 생활했다.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몇 다발 끊어 와서 굴 입구를 가렸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없어졌다. 집은 불타서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웃집에 방을 하나 얻어서 거기서 생활했다.

나는 한번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을 맞닥트린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살이 떨린다.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봤다. 동네에는 잔류 북한군들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았다. 한번은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집안 형님이 인민군이 마루에 걸쳐놓은 총을 만지작거리다가 실수로 자기 허벅지를 쏘았다. 부랴부랴 의원으로 옮겼지만 피를 너무 흘려서 의원으로 가는 길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허벅지에서 진득하게 쏟아지던 붉은 피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평온한 듯 살벌했던 전쟁의 날들이 끝난 뒤, 아버지는 폐허에서 일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집짓기였다. 아버지는 마당에다 몇 번이나 설계도를 그린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지만 이웃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버지는 집을 지어본 적이 없었다. 망치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그저 가족이 필요로 하니까 일을 시작한 것뿐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목수 일을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아버지가 톱질에 망치질까지 전문가처럼 잘했다. 평소 손재주가 좋은 건 알았지만 집까지 뚝딱 지으실 줄은 몰랐다. 그 집은 아직도 고향에 그대로 있다. 실내 인테리어만 바뀌었을 뿐, 골격은 아버지가 지어올린 그대로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다시는 집을 짓지 않았지만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를 그토록 훌륭하게 수행해 내셨던 것이다.

너무 어릴 때라 세세한 기억은 없었지만 무척이나 신기했던 느낌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집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나무와 판자를 이어 붙여 못질을 하고 흙과 돌을 버무려 벽을 쌓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마음에 불쑥 용기가 솟았다. 아버지처럼 가족을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할려고 들면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다시 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울한 기분이 가시는 듯했다. 나는 다시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아버지처럼.

# 친구가 찾아와 “너 돈 없지?”

나는 이 년 만에 밖으로 나와 식당을 열었다. 열 식구가 죽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처형이 과수원원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아내와 함께 동성로에 해물탕집을 차렸다. 아내를 비롯해 온 가족이 나와서 일을 거들었다. 식당이 잘 되려면 내 몫이 가장 클 것이었다. 내가 인맥을 동원해 손님도 끌고 해야 할 것이었다. 막상 식당은 열었지만 거기까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장님’ 소리 듣다가 식당 주인을 하려니 도저히 낯이 팔려서 홀에 나가질 못했다. 손님을 데려오기는커녕 아는 사람이 식당에 들어오면 화닥닥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오질 못했다. 식당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하긴, 네 자존심에 아는 사람들한테 ‘나 식당차렸다’ 할 수 있겠나.”

식당을 폐업한 후 서울에서 원사 생산 회사의 영업 담당 상무로 있던 친구를 만났다. 어릴 때부터 잘 알던 친구라 허심탄회하게 식당 차렸다가 말아먹은 이야길 끄집어냈더니 껄껄 웃으며 저렇게 말했다.

“너 어릴 때부터 자존심 쎘잖아. 장터 애들한테도 궁기(窮氣) 안 비칠려고 소풍 때마다 껌 씹고 그랬잖아. 너 참 대단했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던 듯하다. 소풍을 가면 장터 아이들은 늘 푸짐하게 싸왔다. 김밥, 달걀, 고구마에다 사이다까지 한병씩 소풍 가방에 들어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 동네 아이들은 가난했다. 달걀 하나도 없었다. 닭이 알을 낳으면 시장에 내다팔아 학용품을 사야했다. 소풍에 싸가는 건 엄두도 못 냈다. 나는 하루 종일 잘 먹는 장터 아이들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기 싫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껌이었다. 껌을 씹으면 하루 종일 무언가를 먹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머리가 돌아갔는지, 생각할 때마다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너 참 대단했지!”하는 친구에 말 한 마디에 잘 나가던 시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동산동 인근에 좌판을 깔고 나이론 바지를 팔았다. 좌판을 통해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원사 대리점을 열었고 얼마 후 좋은 ‘기회’를 잡았다. 어망 만드는 실로 스웨터나 나이론 바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거다!’ 하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그 사업에 뛰어들었던 거였다. 부산에서 트럭으로 원사를 실어와 대구에 있는 제조 공장에 넘겼다. 10톤 트럭 네 대면 30평짜리 집 한 채를 살 돈(70만 원)이 생겼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내 공장을 차렸다. 서른도 안 돼 대구에서도 알아주는 젊은 사장님이 된 거였다. 성공한 뒤에는 청송 모교에 장학금도 내놓고 가뭄 때문에 군민체육대회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체육 대회 비용을 부담해주기도 했다.

“너 대리점 차릴 형편 안 되지?”

옛날이야기를 한 바탕 한 뒤에 목소릴 낮춰 그렇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먼지밖에 없는 주머니를 까뒤집어보였다.

“원사 대리점을 해봐라. 물건부터 내려보내 줄 테니까, 그걸 팔아서 몽땅 돈을 올려보내줘.”

때는 섬유 경기가 다시 좋아질 즈음이었다. 나는 친구가 시키는 대로 했다. 물건은 받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일 년이 지나자 친구가 정산을 했다. 통장을 확인해보니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왔다. 그 덕에 얼마 안 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건 아버지와 나의 공통점이었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도 아버지는 늘 인덕(人德)이 많았다. 삼십 호 남짓 되는 마을에서 늘 반장을 했고, 네 개 부락에서 단 한집에 허락되던 담배판매를 허가받았다. 주변에서 큰돈은 아니지만 자주 돈을 빌리러왔는데, 아버지는 늘 원하는 만큼 빌려주곤 했다.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또 주변과 크든 작든 끝없이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그 비결을 일러주곤 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대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거였다. 내가 웃으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고, 내가 살갑게 대하면 사람들도 나에게 친절해진다는 교훈이었다. 그것이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비결이었다.

#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몸부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문제도 사람에게서 비롯되지만 해결책도 살아갈 힘 역시 사람에게서 나온다.

나는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봉사 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세상은 내가 얼마나 잘되든 결국 외로울 뿐이다. 일이든 시간이든 돈이든, 타인과 함께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2000년부터 쪽방촌 봉사 활동과 노숙자 무료 급식을 시작했다. 대구에서는 내가 처음 시도했다. 자원봉사능력개발원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이런 저런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을 20년 넘게 맡고 있으면서 탈북자 돕기에도 적극 나섰고, 국제와이즈맨대구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꾸준한 봉사 덕에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지금은 유네스코 대구협회장을 맡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크고 작은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가고 있다. 가장 의미 있는 봉사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주변에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았던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몸부림이자 자식들에게도 물려주어야 할 위대한 유산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열심히 씨앗을 뿌려두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아버지의 삶에서 목격했고, 내가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내 고향에서 54%의 표를 얻은 것도 8할은 아버지의 인덕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령에 돌아가셔서 덤덤한 마음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제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평심이 무너졌다. 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살아서 내 앞에 계신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똥지게를 지고 나가셔서 달이 뜰 때까지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셨다. 하루 종일 소똥을 굴리는 소똥벌레처럼 쉬지 않고 흙을 만졌다. 어찌 그리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행 같은 일상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반복하셨다. 또한 6.25 때 집이 불 탄 자리에 다시 주춧돌을 놓고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목수 일을 하면서 튼튼한 집을 지어 올리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것은 이후의 내 삶에서 “용기를 내라”, “열심히 해라”하는 백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 생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아버지는 말없는 말로 내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신 것이다.

나는 엎드린 채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흐느껴 울었다. 이제 더 이상 해드릴 것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갑자기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평생 단 한 순간도 아버지다운 모습을 잃지 않았던 내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바칠 수 있는 헌사는 눈물이 전부였다.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아버지를 추억하고 당신의 삶을 칭송할 수 있어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계실 때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 된다. 훌륭한 부모를 둔 자식에게 그리움은 가장 큰 형벌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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