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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런 사람이 있었단 말야?

독도 바르게 알기 청소년 캠페인 - 책으로 배우는 역사

  • 입력 2015.11.01 00:00
  • 수정 2015.11.04 15:05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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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가 같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유감의 극치”
- 1915년, 역사학자 카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허구의 인물이라는 뜻)
- 1924년, 역사학자 시데하라 탄(幣原 坦)


일본 제국은 그를 부정하려 했다. 그에 관한 모든 기록이 조작된 것이며 따라서 허구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들이 부정하려 한 인물은 사야가(沙也可)란 일본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새로 얻은 이름은 김충선(金忠善, 1571~1642), 1592년 임진왜란 개전 초기 조선에 투항해 침략군과 싸운 인물이었다. 그의 투항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진격하면서 효유서(曉諭書)를 써서 백성에게 돌렸는데, 여기에 ‘기미’가 보인다. 

‘...지금 나는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이고 비록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벌써 마음으로 맹세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너의 나라를 치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내 일찍이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면서 한번 와서 보기가 소원이었고, 이 나라의 교화에 젖고 싶어 한결같이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모하당문집>


이후 투항하면서 임금에게 올린 문장에도 비슷한 고백이 담겨 있었다.
‘저는 청정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미워하여 청정의 손에 죽을지언정 선봉이 되고 싶지는 않
았지만, 평소의 소원인 조선을 한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으로 본의 아닌 선봉이 되어 삼천 명의 군사
를 이끌고 본국에까지 나온 것입니다.’
비록 고국이지만 명분 없는 전쟁의 앞잡이가 되기 싫었던 그는 과감히 평소 사모한 나라에 운명
을 맡기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조총 기술을 조선에 전수하고,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경주성을 지친 박의장은 그가 알려준 조총 제조법으로 조총을 만들어 여러 차례 전투
에서 승리했다.
말년의 그는 대구 가창 우록동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지역에는 그의 후손들이 모여 살았다. 그의 존재가 인정된 것은 1933년이었다. 조선 총독부 역사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가 대구 우록동을 현지 조사하는 한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바탕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김충선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런 후에도 그는 다시 잊혀졌다. 김충선, 혹은 사야가가 일본에 다시 알려진 것은 1971년 시바 료타로(司馬遼太)라는 인물이 저술한 <가도街道를 간다 - 한韓나라 기행>에 김충선을 소상하게 소개하면서였다. 그는 책에서 우록리를 상세하기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김충선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처럼) 적극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념행사를 즈음해서 일본에 방문해 김충선의 행적을 널리 알렸다. 후손들 덕분에 김충선은 드디어 ‘매국노’, ‘잊고 싶은 일본인’이 아니라 부당한 전쟁에 반대한 ‘평화의 사도’로 일본에서 자리매김했다.
김충선의 존재는 지금의 한일 관계에 더더욱 중요하다. 우익들은 아직도 김충선을 부정하고 싶어하겠지만, 일본 내 양심세력에게 그의 존재는 어떤 실마리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온 삶을 다 바쳐 한일관계의 실마리를 남기고 떠난 일본인 김충선. 400년이 흘렀지만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그를 기리는 것은 그의 진심(眞心)이 아직도 통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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