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의 어머니] 두 번의 이별과 파산에도 한결같이 꿋꿋했던 어머니

김영남 위드솔루션 이사

  • 입력 2015.10.01 00:00
  • 수정 2015.10.01 11:56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아니, 한꺼번에 몰려오기 때문에 불행이다. 1996년 1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뜩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요양사를 따로 둬야 할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건강관리 좀 하시지. 젊을 때부터 간이 안 좋았는데…….”
어머니가 애시린 원망을 했다. 당신의 병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연합통신(지금의 연합뉴스)의 기자였다. 마지막 직책은 취재부장이었다. 기자들은 술자리를 피할 수 없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을 것이다.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많았으리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얼마 후 군대를 갔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술이라도 한잔했을 텐데, 하는 생각은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가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쓸쓸한 기분을 지우려 친구들과 어울려 거나한 송별회를 하고 노래방에서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목청껏 부른 후 입영 열차를 탔다.
 

 

자기 일처럼 우리를 돕던 친척, 알고 보니...
몇 달 후 첫 휴가를 나왔다. 나는 군화도 벗지 않은 채 어머니에게 손을 벌렸다.
“용돈 좀 주세요. 친구들하고 만나기로 했어요.”
나는 어머니가 냉큼 일어서서 지갑을 열줄 알았다. 어머니는 미동도 하지않았다. 대신 엷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없다. 집에 돈이 씨가 말랐다.”
나는 발끈 화가 났다. 군대에서 휴가 외에 무슨 낙이 있을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전보다 넉넉하지 못한 건 알겠지만, 얼마나 알뜰하게 살려고 아들 첫 휴가 나왔는데 용돈도 안 주려고 한단 말인가. 나는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왔다.
“앉아봐라. 너한테 이야기할 게 좀 있다.”
새벽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아직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가장으로서의 위엄이 서려있었다. 술기운이 가셨다. 그날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리고 내가 군대에 가 있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려줬다. 아버지가 아프시고 또 운명을 달리하실 즈음이 도와주던 ‘삼촌’이 있었다. 외가 쪽의 친척이었다. “아무래도 피가 섞인 사람이 안 낫겠나” 하면서 그 사람을 많이 의지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떠난 후 그는 어머니에게 사업제의를 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줬는데, 오락실 사업을 해서 수익이 나오면 돈을 갚겠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사업은 오락실이었다. 4명이서 동업을 하는 거라고 했다. 어머니도 1/4을 담당했다. 공동 투자를 한 셈이었다. - 어머니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는 건 오락실이 망하고 난 다음에 드러났다. “4명이서 같이 돈을 모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우리집 돈만 들어갔더라. 잘 되면 다 같이 나눠 쓰고 못 되는 나 혼자 쪽빡 차는 구조였던 거라. 사정이 그래 됐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 5억 남짓한 돈이 다 그리로 들어갔다. 기둥뿌리까지 뽑힌 셈이었다.
“너거 아부지가 살아 있었으면, 이런 일이 있겠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군생활이야 꾸역꾸역 지내다보면 제대 날짜가 다가오겠지만, 집안 형편은 언제 나아질지 기약이 없었다. 제대한 후 택시 운전, 학원 버스 운전, 카페 알바, 술집 웨이터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복학해서는 아파트 관리실에서 1년 정도 근무했다. 밤새 전기실을 지키는 일이었다. 서울에 가서 재건축 현장에서 철거작업을 한 적도 있었다. 1달 만에 몸무게가 15kg이 빠졌지만 마음은 편했다. 일만 있었으면 계속 철거 현장을 다녔을 것이다. 남동생은 대학에 진학한 후 휴학계를 내고 경찰공무원 준비를 했다. 열심히 했지만 낙방을 거듭하다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취업을 했다. 다행히 여동생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다가 2004년 대구를 훌쩍 떠났다. 졸업한 게 아니었다. 3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건설사에 취직했다. 주변에는 “공부를 계속할 형편이 못된다.”고 말했지만 무작정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2009년에 복학해서 학교에 입학한 지 15년 만에 졸업장을 땄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동생보다는 낫다. 동생은 아직 방통대에 다니고 있
으니까. 형으로서 측은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가장 노릇을 한 여고 시절의 어머니

 

가장 고생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화려한 노후를 꿈꿨지만 갑작스런 죽음과 뒤이은 사기 때문에 결국 늦은 나이에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했다. 아니 시작이라기보다는 견디는 삶이었다. 예전처럼 다시 상승기류를 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어머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보험이었다. 열심히 뛰었지만 잘 되지 않아 다른 일도 함께하시게 되었다. 식당에서도 일한 적도 있고, 1년 가까이 나이트에서 아가씨들 백을 보관해주는 일을 하신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뭐든 다 하신 거였다.
“안 힘드세요?”
한번은 넌지시 그런 질문을 던졌다. 어머니는 빙긋 웃고 말았다. 이정도 고생 쯤이야, 하는 뜻으로 들렸다. 고생이라면 이골이 난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일찍 집을 나가는 바람에 외할머니와 이모 한분과 같이 살았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돈을 벌러 타지로 나가면 이모와 친척집에서 생활했다. 구체적인 말씀은 안 하셨지만 꽤나 구박을 받았던 듯했다. 눈칫밥 많이 먹었단 말을 몇 번 흘렸다.
근근이 버티듯 살았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 좋은 외할머니는 몇 번이나 사기를 당했다. 계주가 달아나는 바람에 곗돈을 날렸다고 했다. 벌이도 시원찮은 마당에 사기까지 당하고보니 ‘쥐구멍에 볕 뜰 날’이 찾아올 리 만무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도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산업체 고등학교에 다녔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을 했다. 그렇게 번 돈을 꼭 필요한 데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집으로 부쳤다. 고등학생 땐 소년소녀 가장 노릇을 한 셈이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부산체신청에 다녔다. 당시로는 공무원으로 인
정해주는 직장이었다. 거기서 연애도 했다. 아버지를 만난 것이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로선 그야말로 오랜 만에 숨통이 트인 나날이었을 것이다.외갓집 형편이 조금 풀린 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올 무렵이었다. 외할머니가 대구로 나와 하숙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안정되었다고 한다.

 

“원망이 깊으면 몸과 마음이 망가진다”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인생은 훌쩍 떠나버린 남자들 때문에 두 번이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 외할아버지, 이른 나이에 처자식을 남겨두고 훌쩍 떠나간 아버지까지. 게다가 2대에 걸쳐 ‘혼자 사는 여자’를 노린 사기극에 휘말렸다. 내가 어머니의 입장이라면 세상을 향한 원망으로 오뉴월에 서릿발도 내리게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무너지지 않았다. 끝끝내 안동 양반가의 후손다운 면모를 잃지 않으셨다. 사기를 당하고 난 직후에도 어머니는 우리를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정직하게 살아라. 남들 어떻게 살든,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 그리고 요행수도 바라지 마라. 이렇게 된 이상 버티고 극복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한번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홉시 넘어서면 밖에도 안 나가시던 분이 새벽까지 춤추고 노는 아가씨들의 가방을 지키고 앉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당신에게는 그런 청춘이 없었다. 젊을 때 실컷 놀고 그런 친구들 뒷바라지를 하는 거라면 인과응보라고 할 만하겠지만 어머니는 그 나이에 당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직장일에만 매달렸다. 어느 명절 때,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우리에게 사기를 친 친척을 찾아가서) 곤죽이 되도록 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타이르듯 담담하게 말했다. 
“다 지난 일이다. 흘려버려라. 잊어버려라. 원망이 깊으면 마음도 몸도 모두 망가진다. 우린 우리대로 잘 살고 있잖아.”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면 신기할 만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렇지 나만 손해겠지’하는 마음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심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말씀에 신비할 만큼의 힘이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바로 그렇게 살아오셨기 때문이었다. 굳건하게, 흔들림없이, 두 번이나 비슷한 상황을 겪었음에도 자식들을 위해 무너지지 않고 반듯하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 자체가 나에게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에게 어머니의 삶은 그 어떤 웅변보다 큰 목소리로 내게 다가왔다. 이제 ‘겨우’ 긴 터널을 빠져나왔단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때때로 머리가 아뜩하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어머니가 중심을 잃지 않고 잘 버텨주셨고, 동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한 덕이라고 믿는다.
여동생은 2008년 결혼해서 자녀 셋을 둔 어머니가 되었고 남동생은 딸 하나를 둔 딸 바보 아빠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 또한 병원이나 기업 전문 컨설팅에 뛰어들어 이제는 웬만한 병원 관계자는 이름만 대면 아는 정도의 지명도를 가지고 있다. 아뜩한 벼랑 끝에 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하루 하루 너무 평온해서 걱정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그 사이 내 마음에 전혀 기대하지 않던 것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은 묵직한 자신감이다. 내가 이런 세월까지 버텨냈는데, 뭐가 두려울까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솟을 때가 많다. 절망의 순간 어머니의 마음을 붙든 것도 바로 그런 자신감일지 모르다.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어머니, 동생과 함께 끝내 좋은 시절을 만들어내고 만 가문의 저력. 어머니의 저력이 내게도 전해진 느낌이었다. 하고 보면 어머니는 내게 당신 삶 전부를 쏟아 부어서 ‘가정교육’을 한 셈이다. 어머니의 삶이 워낙 지순했기에 나는 그 교육의 울타리 밖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덕에 나 역시 어머니만큼의 마음의 힘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이 어머니의 은공이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켰다.
이보다 더 지극한 어버이의 은혜가 어디 있을까.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