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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 쓰는 미국

독도 바르게 알기 - 책으로 배우는 역사

  • 입력 2014.08.04 00:00
  • 수정 2015.07.31 10:53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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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입니다. 일본의 망언과 상식 밖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우발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직후부터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자기만의 논리를 국제 사회에 퍼트리고 다녔고, 때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부터 간헐적으로 망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치밀한 전략으로 독도 침탈 작전을 진행하는 사이 우리는 망언에 발맞추어 “독도는 우리 땅” 시위를 펼쳐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비치게 만드는데 일조하거나 “일본은 무조건 억지를 쓴다”면서 정작 독도의 역사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독도바르게알기 운동본부에서 ‘독도 바르게 알기’ 캠페인을 펼치는 이유는 무관심과 무지를 관심과 사랑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알아야 지킬 수 있습니다. 일본인의 기본 마인드와 전략, 그리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논리를 개발해야 그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본 역사 캠페인이 일본의 책략이 무엇인지, 또 독도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 미국에서 「일본해」라는 명칭을 일본 식민지배와 결부시키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6월, 워싱턴DC 존스홉킨스 국제관계대학원(SAIS) 한미연구소에서 ‘동해-일본해 병기 워크숍’이 열렸다. 조지프 스톨트먼 미국 웨스트미시건대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일본해라는 이름을 사회적 정의 문제와 연관시키는 일이 잦아졌다”고 밝혔다.
미국인들이 반성을 문을 쓰는 듯하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인들은 일본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찬성했다. 물론,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직의 성향이었지만 말이다.
일제강점이 막 시작될 즈음 한중일은 이상한 삼각관계를 형성했다. 간단히 말하면 대한제국은 미국을 짝사랑했고, 점잖은 척했던 미국은 일본과 호박씨를 까고 있었다. - 이런 사실은 미국 국민들마저 까맣게 몰랐다.
고종 황제는 1905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테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0.27 ~ 19191.6)의 딸(앨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미국을 형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오.”(1897년)
고종이 미국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사이 루스벨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말했다.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했으면 좋겠다.”
후일, 루스벨트는 1882년에 체결된 조미통상조약에 관해서도 궤변을 늘어놓았다. 조약에는 ‘조정 노력을 다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그는 “조약은 대한제국이 스스로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 의거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자치나 방어에 있어 완전히 무능력했다”고 말했다.
앨리스와 고종이 축배를 든 2달 후 미국인들이 서울에서 빠져나갔다. 한 외교관은 ‘침몰하는 배에서 우르르 도망치는 쥐들 같았다’고 회고했다. 1906년 루스벨트는 미국 정부의 외교기록에서 ‘대한제국’이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조선은 ‘일본’ 란 아래로 들어갔다.
루스벨트는 비뚤어진 문화론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을 문명국으로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를 비(非)문명지역으로 구분했다. 자신에게 선배들이 (인디언을 청소하면서) 서부를 개척했듯 아시아를 문명화하는 시대적 소명을 타고났다고 믿었다. 그 ‘위대한 역사적 진보’에 함께할 파트너로 일본을 지목한 것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그는 상원에 승인도 없이 일본과 밀약(가쓰라 태프트 조약)을 맺었다. - 이는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는 일본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이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면서 ‘비겁하게’ 선전포고도 없이 해군을 기습 공격한 것을 놓고도 아들에게 “일본이 우리 게임을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일본의 승리가 참으로 기쁘다”고 말했다. 룰을 어긴 것이었지만 ‘목적’만 달성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과정을 개의치 않았다. 그의 사고방식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되었다는 건 40여년 후에 드러났다. 또 다른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ㆍ1882~1945)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었다. 모든 미국인이 분노했다. 테어도어 루스벨트가 살아 있었다면 국민들에게 멱살을 잡히지 않았을까.
더 큰 비극은 미국 본토에 앞서 한반도에 일어났다. ‘동해-일본해’ 병기에 앞서 ‘미국 시민’들이 먼저 눈을 뜬 정의의 문제, 바로 위안부였다. 미국의 분석에 의하면 줄잡아 20만의 어린 소녀들이 일본군 부대에 제공되었고, 대부분 무수한 강간을 당한 뒤 목숨을 잃었다. 루스벨트가 인정한 아시아의 문명국 일본이 한 짓이었다.
모든 비극의 단초를 제공하다시피 한 루스벨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미일 비밀 조약을 꽁꽁 숨긴 채 포츠머스 회담을 주도해 러일 전쟁을 종식시킨 공로로 노벨상까지 받았다. 미일 비밀 조약은 그가 죽은 후에야 알려졌을 정도로 훌륭하게 은폐했다.
‘동해-일본해 병기 워크숍’에서 학자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반성의 말들이 오가는 동안 일본은 뭐라고 했을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동해가 한국인이나 한국 정부에 중요하지만 지역적으로 쓰이는 이름이며, 국제적으로 현 시점에서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다.”
일본은 아직도 ‘아시아 유일의 문명국’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그들은 문명의 창조자라도 되는 것처럼 앉은 자리에서 몇 가지 신(新)개념을 뚝닥 빚어냈다. 주성재 지리학과 교수는 “10여 년 간 다른 지리 전문가 회의에 참석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된 이름’이나 ‘지역적인 이름’이라는 개념은 쓰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우리에게 ‘야만’이니 ‘비문명’이니 하던 올가미를 씌우던 때와 다를 게 없다. 그런 개념들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일본 관계자들에게는 기습공격(1904년)이든 일본해 표기(1920년)든 자기들이 하는 일이라면 덮어놓고 찬성해주던 루스벨트가 죽고 없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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