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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특별하게 만든 평범한 것들

  • 입력 2014.09.18 00:00
  • 기자명 유명상 한국일보 대구경북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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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치 이야기입니다. 괜히 입씨름하다 보면 오랜만에 만난 친척끼리 싸움이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견’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야 할 것 없이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건 똑같아 보입니다.
그런 사정을 반영했을까요. 올해 여름 화제작으로 떠오른 한국 영화들에 담긴 ‘윗분’들에 대한 시선이 묘합니다. ‘군도’와 ‘명량’이 바로 그렇습니다. ‘군도’는 탐관오리에 억압받는 백성들이 주인공이고, ‘명량’에는 ‘한 번 잘해보려고’ 그렇게 애쓰는 이순신 장군을 괴롭히는 얼치기 관리와 생각 짧은 임금이 안주거리로 출연합니다. 관객 수에 상관없이 두 영화 모두 답답한 정치판을 여실하게 반영했단 느낌이 듭니다.
저는 두 영화 중에서 ‘명량’을 주목합니다. ‘군도’는 구체적인 스토리가 허구지만, ‘명량’은 엄연한 사실이자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명량’의 흥행 이유는 간단합니다. 겁에 질린 군사를 모아 왜적에 맞서는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에서 이 시대의 ‘난국’을 헤쳐 나갈 희망과 지혜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의 리더십에서 희망을 봅니다.

이순신의 사명감, 죽음도 잊게 만들어
무엇보다 이순신은 책임감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임무가 주어지면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전쟁 때뿐 아니라 평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제일 먼저 훈련장에 나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훈련을 비롯해 배와 무기, 군량미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체크하면서 허술하게 일처리를 하는 부하가 있으면 호되게 혼을 냈습니다.
부하들에 대한 책임의식도 강했습니다. 그는 승산이 충분하지 않은 싸움에는 결코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적어도 다수의 수군이 이순신에 이끌려 바다에 수장당한 일은 없었습니다.
이순신이 원칙주의자라고만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융통성을 발휘할 줄도 알았습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이 조선 수군에 합류했을 때였습니다. 진린은 성격이 포악하고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조정의 대신들 모두 진린이 합류하면 수군의 전력이 약화할 것으로 예상했을 정도입니다.
이순신은 진린이 오던 날 큰 잔치를 마련하고는 멀리까지 나가 그를 맞아 비위를 맞추고, 얼마 후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왜적 40명을 잡아 죽이고 그 공을 진린에게 돌렸습니다. 이때부터 진린은 완벽하게 이순신의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의 투철한 책임감은 죽음 직전에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지금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 그는 목숨마저도 전투의 일부로 치부했을 만큼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늘 공부하는 장군, 백전백승의 비결
이순신은 요즘 말로 ‘통섭’에도 능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이론과 경험, 현장에서 얻은 정보를 두루 활용했습니다. 장군은 명량해전 직전에 군사들에게 병법을 이야기합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 그리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전자는 <손자병법>을 쓴 손자의 말이고 후자는 중국 서진(西晉)의 시인 좌사가 지은 <촉도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무인들 사이에서 우뚝한 독서력을 자랑했습니다.
그가 무과 시험에 응시했을 때였습니다. 시험관이 물었습니다.
“장량(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이 적송자(신선)를 따라 놀았다고 했는데, 장량은 정말 죽지 않았을까?”
그러자 이순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통강감록[通鑑綱目]에 임자(壬子) 6년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선을 따라 죽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모두 꾸며낸 말입니다.”
시험관들은 “무인이 어찌 그런 일까지 알 수 있느냐?”고 탄복했습니다.
경험에서 얻은 지식도 잘 활용했습니다. 그가 한산도 대첩에서 쓴 ‘학익진’은 원래 육군들이 쓰는 진법이었습니다. 특히 칭기스칸이 이끌던 몽골군들이 이런 진형으로 철갑을 두른 유럽의 기사부대를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육지에서 쓰던 병법을 바다에 가져와 탁월한 성과를 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장 정보도 중요시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처음 호남 좌수사로 임명되었을 때 좌수영 뜰에 인근 주민들을 모아 놓고 같이 짚신을 삼고 길쌈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를 어려워하던 백성들이 시간이 지나자 허심탄회하게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어디 가면 고기가 많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디엔 암초나 바람이 많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따위의, 바닷사람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군사적으로는 요긴한 정보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이순신은 매번 지형 지리를 이용해 적을 유린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공부’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순신은 인문학적 지식과 경험, 그리고 현장에서 얻은 정보를 열심히 버무렸습니다. 그 결과 ‘명량’에서처럼 가장 창의적인 방법으로 전투를 이끌어 승리를 얻었습니다. <징비록>은 승리의 과정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하여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던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모두 실천 가능한 것들입니다. 매일 아침 내가 왜 어떤 일을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한다면 남다른 사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통섭과 소통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독서와 잡담을 겸한 토론을 생활화 한다면 얼마든지 창의적인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장군이 전사했을 때 (명나라와 조선의) ‘모든 군사들이 엎드려 통곡하자 바다가 울릴 정도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지금의 백성들도 통곡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조금 다른 이유입니다. 수군과 백성들은 난세에 리더를 잃은 것에 슬퍼했지만, 우리는 이런 난세에도 진정한 리더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명량’이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요.


유명상 한국일보 대구경북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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