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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불능 폭력’과 결별, 다시 아내를 안다

행복한 가정, 이렇게 지켰다

  • 입력 2015.05.19 00:00
  • 수정 2015.06.05 10:30
  • 기자명 김윤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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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천사의 추락’(1923-1947)

아내가 가출했다. 처가와 아내의 지인들을 수소문했지만 흔적이 없었다. 수없이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문자를 넣었지만 답이 없었다. 막내인 4살 아들과 위로 9살, 10살 연년생 딸아이를 먹이고 입히고씻기고 재우고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는 일은 40대인 그의 몫이 됐다.아이를 챙기면서 아내에 대한 애증이 교차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럴수는 없다’ 싶다가도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했다. 칠순을 앞둔어머니가 자주 들렀지만, 관절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그는 이틀 만에돌려보내드렸다.그는 아내가 가출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가끔씩 그는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크게 소리만 질렀을 뿐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폭력은 점점 폭력성을 더했다.그는 가끔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내로서는 언제 또 베일 뒤에서 무엇이튀어나올지 모르는 공포영화와 같았다.그런 아내의 심정을 그는 몰랐다. ‘가끔이었지만’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나면 그는 이내 후회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러고는아내에게 잘 해주었다. 등을 두드려주고 주물러주고 저녁 설거지도 하고 휴일에는 아이들과 잘 놀아줬다. 평소에 이렇게 잘 해주는 것으로그는 폭행을 만회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반복됐다. 물론 가끔이었지만.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날 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많이 심했다. 병원을 퇴원하는 날 아내는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그는 반듯한 공무원이었다. 외모 또한 훤칠해서 남들 보기에 모자랄것이 없었다. 거기에다 그는 효자였다. 그런 그의 성격은 무척 깔끔했다.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제 자리에 딱딱 있어야 했다. 집안 구석구석먼지가 쌓이거나 머리카락 하나라도 눈에 띄는 꼴을 못 봤다. 아이들역시 그렇게 깔끔하게 키우기를 원했다.아내는 몸이 약한 편이었다. 맞벌이는커녕 아이들 건사하는 것도 버거웠다. 남편이 나름대로는 열심히 도와주기는 하지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남편의 성에 차게 하려면 청소며 정리며 빨래며 집안일은 끝이 없었다. ‘정신적 신혼’은 빨리 끝났다. 둘째 아이가두세 살쯤 되면서 아내는 진이 빠진 것 같았다. 지친 그녀는 남편의 요구를 무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리만 지르던 남편은 이제 손찌검까지 했다.시어머니는 남편 성격과 많이 닮았다. 아니 남편이 시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것이다. 손주를 돌봐주러 들르는 시어머니와 작은 일로 부딪혔다. 남편은 몸도 불편한데 아이들 돌봐주러 온 어머니를 왜 구박하느냐며 시어머니 편을 들었다. 어떨 때는 아내 편을 들기도 했다. 일관성 없는 남편의 태도에 아내는 자신의 존재 가치가 참 별 게 아니구나 싶었다. 한 번 미워 보이기 시작하자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이다.그는 자신이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해주는 게 남들에 비해서 모자랄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번듯한 직장에 무척 가정적이었다. 아주 가끔폭력을 행사하지만, 그만큼 평소에 잘 주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만회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 ‘더는 당신과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청난 배신감 같은 게 몰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나.’ 그의 통제력은 다시 무너졌고, 결국 끔찍한 일이벌어진 것이다.아내가 가출한 지 한 달째. 세 아이 챙기랴 직장일과 출퇴근에 그는 녹초가 됐다. 아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실감했다. 그렇지만 이번일은 심각했다. 사실 그로서도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런상황에서 이런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게 뻔했다.이번에도 회답이 없을 줄 알았지만, 그는 또 아내에게 긴 참회와 사과의 문자를 보냈다. 말미에 ‘가정을 회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당신 처분대로 하겠다’는 결심을 덧붙였다.놀랍게도 아내로부터 답신이 왔다. 아내의 요구는 낯설었지만 구체적이었다. “상담소에 가서 2개월 반 과정의 상담 프로그램에 등록하고잘 마치고 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남편의 폭력성이 남편의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내도 잘 알고 있었다.그런 폭력성만 없다면 남편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깔끔하다는 것이다 허물인 것은 아니었다.그는 평소 같았으면 그런 상담소 같은 곳에 절대로 갈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나 공무원 신분 유지에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그는 다음 날 상담소의 문을 들어섰다. 상담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며칠간 개인 상담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다 털어놓았다. 그동안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천근만근 마음을 누르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그는 분노조절장애였다. 어릴 때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에게 폭력을행사했다. 그 정도가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절대 복종했다. 그는 그런 아버지를 모델로 학습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가까운 사람이 그럴수록 분노는 더 커졌다. 그는 자신의 ‘마음의 병명’을 받아들고 울었다. 그 자신도 일종의 피해자였다.상담 프로그램을 끝내고 나면 보겠다던 아내는 집단 상담시간 그곳에 와 있었다. 아내는 그동안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시설인 ‘쉼터’에가 있었다. 흉기를 휘두르는 남편 앞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서는 많은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와 아내는 그동안 둘 사이에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다른 부부들 앞에서 털어놓았다. 사람은 큰일 때문에 마음다치기보다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한다. 그런 작은 일들로 벌어진 틈새가 나중에 메울 수 없는 강처럼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두 달 반 동안 그들은 남편의 깔끔한 성격, 육아문제, 고부갈등, 그리고 남편 폭력의 실상과 그 폭력성의 어두운 원천에 관해 엄청난 이야기를 쏟아냈다. 서로의 마음속을 함께 들여다봤다. 결국 모든 문제의근원은 소통부재였고 그 열쇠는 폭력이라는 대화 방법 말고 다른 대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상담 프로그램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 후 아내는 두어 번 상담소를 다시 찾았다.상담 프로그램을 마친 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다. 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들르듯,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상담소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음이 아픈 이들은 마음 병원으로 가야 한다.그렇게 그들은 가정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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