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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만 남은 어르신들’ 자존감 회복부터 40대 귀농…작은 실패 넘어 성공 밑그림

월 1회 어르신들 심리 치료 ‘자존감 농장’ 직거래 장터·청년 정착 지원 사업 등 전개

  • 입력 2022.01.05 00:00
  • 수정 2022.02.23 10:16
  • 기자명 김윤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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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윤 사회적 농장 의성 평평마을협동조합 대표.


 지방도를 벗어나자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차 한 대 겨우 지날 좁은 길은 패어 있 다. 차가 크게 한 번 덜컹거리고 오르막길을 오르자 창밖 풍경이 실감났다. 벼 베고 남은 밑동이 땅 무늬처럼 이어지는 겨울 논 마지기에는 인적이 없다. 의성은 지역 소멸 위기 1순위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청장년이 여기 있다. 의성군 안사면 만리 리 평평마을협동조합. 황성윤(47) 대표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고교와 대학은 대구 서 다니고 구미 중소기업에서 14년을 일했다.
 그뿐이었다. ‘내려갈 일’만 남은 것을 알았다. 그가 놀기엔 좁은 터였는지 열심히 달려온 14년 일터에서 더 오를 데가 아니라 내려갈 길뿐이라니. 그는 아직 젊었다. 새로 공장을 차릴 형편은 되지 못했다. 고민 끝에 귀농을 결심했다. 2014년 그는 떠 난 지 OO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2만 평(66,116㎡), 200마지기 대농이었다. ‘반거들충이’ 농사꾼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빡세게’ 농사일을 배웠다. 농사꾼이 돼 몸으로 겪는 농촌 현실은 명 절과 휴일, 휴가 때마다 들락이며 어깨 너머로 봤던 것들과는 크게 달랐다. 그래도 고향이어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에게도 대농 기질이 있었는지 올해까지 논을 3만 평(99,174㎡), 300마지기로 늘렸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벼농사는 3만 평 정도는 해야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양파·마늘 농사도 하지만 주수입원은 벼였다. 논 3만 평 연 수입은 대략 5 천만 원. 농약, 비료, 자재 등 비용을 제하면 수익은 3천만 원 정도였다. 아버지와 아들, 두 집 살림으론 빠듯했다. 그럼에도 좀 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젊은 의욕이었다.


- 직거래 장터와 마을협동조합 설립 과정은?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어보니 알겠더라고요. 생산은 노력하면 하는 만큼 어느 정 도까지는 늘릴 수 있지만 판매와 유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 는 부분이 많았어요. 지인이나 주변에 일부 쌀 판매를 하기도 하지만 거의 전적으로 벼째 국가 수매, 농협 수매를 통해 판매하는데 수매 시기가 끝나면 판로가 막막합니 다. 쌀 등으로 부가가치를 높인 가공 식품 판매는 엄두도 못 내고요. 그래서 의성 농산 물 직거래 장터인 ‘농부달장’(달장은 한 달에 한 번씩 서는 장이라는 뜻)과 공동체 성 격의 ‘평평마을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힘들게 생산한 농산물을 함께 판매·유통해 서 서로 도와가며 비용은 줄이고 수입은 늘리자는 거죠. 평야 지대이자 소비 중심 지 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안계, 안사 등 의성 서부 7개 면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수시로 머리를 맞댔죠. 농업 관련 우수 프로그램들도 벤치 마킹했고요. 정부 와 도·군 지원사업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평평마을은 이들 7개 면 마을을 통 틀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 정착 지원 프로그램이란? 
 “마을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2020년 도시 청 년들이 6주 동안 평평마을에서 거주·생활하면서 지역 정착을 준비하고 의지를 다지 는 ‘청춘구 행복동’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도시 청년들의 지역 정착 지원 프로그램이 죠. 의성군 지원사업으로 인터넷, SNS 등을 통해 희망자 신청을 받았는데 1, 2기에 18~20명 참여해 면접을 거쳐 선발했습니다. 1기에서 일곱 가구가 평평마을에 정착하 는 큰 성과를 거뒀어요. 내년에는 청년 일자리 창출과 주거공간 조성, 생활 여건 개선 등을 내용으로 ‘이웃사촌 시범마을’ 사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 사회적 농업을 시작한 계기는?  
 “올해로 귀농 8년차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과 일을 겪고 부대끼면서 깨달은 사실 은 지금 농촌에 남은 어르신들은 결코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힘들여 공부시킨 자식들은 도시로 나가서 오지도 않고, 남편은 일찍 돌아가서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마음을 터놓을 데도 소통할 대상도 없습니다. 농사일은 고된데 끝이 없고 농사 지은 걸 팔아봐도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별로 없고요. 그러니 가슴에 화만 남았습니다. 툭하면 이웃 간에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할 수 있 어요. 이런 어르신들은 마음을 열고 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와 세상에 대한 불 신이 커서죠.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늙은이’가 되고 마는 것이죠.
 특히 이 지역에는 농지가 절대적으로 협소합니다. 농사 지을 땅이 운명적으로 모자 라니 다들 땅에 한이 맺힌 사람들 같습니다. 그래서 땅을 둘러싼 분쟁과 갈등이 많습 니다. 어렵게 농지를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이 농지를 임대하려는 다른 사람 이 더 높은 임대료를 땅 주인에게 제시합니다. 땅 주인의 마음은 흔들리고 결국 기존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 임대 계약하기 마련입니다. 땅 주인, 기존 임대인, 새 임대인 간 에 갈등과 분쟁이 생기는 거죠. 이런 분쟁은 해결하고 조정할 방법이 사실 없어요. 이 웃이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지금 농촌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어르신들에 대한 정 신적 치유, 심리 치료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도시 청년들을 지역에 정착하도록 하 는 것은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한 절박한 과제입니다. 이와 함께, 지역을 지키는 어르신들 가슴에 쌓인 화를 풀어내는 정신 치유, 심리 치료 역시 더없이 중요합니다.
이런 취지로 지역을 지키는 어르신들의 자존감을 높여서 심신의 안정과 평화, 행복 감을 높일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고령의 귀촌·귀농자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프로 그램을 마련해 지난해 사회적 농업(농장)으로 지정받았습니다.“


- 자존감 농장 프로그램이란?
 “자존감 농장 프로그램은 사회적 농업(농장) 추진 사업의 하나로 지난해 6월부터 진행했습니다. 고추 농사를 지으시는 어르신 세 분을 대상으로 시작했습니다. 뙤약 볕 아래 쪼그려 앉아 고추를 수확하는 일은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에 새벽 3시에 시 작해 오전 11시 오전 일과를 끝냅니다. 햇살 뜨거워지기 전에 최대한 작업 시간을 확 보하는 거죠. 오후 1시까지 점심·휴식시간입니다. 이때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를 자존감 농장의 심리 치료 시간으로 잡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대구에서 온 정신과 전 문의가 이 시간에 어르신들을 만납니다. 초기에는 어르신 개별로, 3개월 후부터는 어 르신들끼리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집단 면담 형식으로 심리 치료를 합니다. 심리 치료 도중에 어르신들은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다 열거나 털어놓는 것은 아 직 아닐 것입니다. 수십 년 쌓인 가슴 속의 것들이 몇 달만에 해소될 수는 없을 테니 까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대상 인원도 더 늘리고 싶지만 비용이 만 만치 않아서 쉽지 않네요.”


- 앞으로 계획은?
 “어르신들이 손수 차린 어머니 손맛 밥상 체험 프로그램을 현재 진행하고 있는데 규모를 좀 더 키울 계획입니다. 또 문의산에는 나물이 지천인데 나물 캐기 하는 어르 신들을 따라다니며 나물에 대한 설명이나 얽힌 이야기를 듣는 나물 캐기 체험 프로그 램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은 이견이나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을협동조합의 취지 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작은 실패들을 발판 삼아 새해에는 마을의 더 큰 성공을 위해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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