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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22.01.27 00:00
  • 수정 2022.03.23 15:02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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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이제 중년은 시시해졌다. 나는 늙었거나 늙는 중이다. 서 리가 내리고 살얼음이 얼면서 겨울이 시작되듯, 마침내 나는 노년에 접어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늙음이 다가오고 있다. 늙음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여기까지 늙는 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나는 혼자 늙어가는 일이 불안하고 두렵다.
 아무리 상상해도 내가 노인이 된 모습은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혼자 조용히 보내는 시간은 평화롭지만, 혼자 늙는다는 것은 외롭고도 지루한 일이다. 노년에 대한 막막함은 혼자일 때 가장 크다. 바로 그 혼자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종종 나약해진다. 혼자라서 생기는 문제는 혼자가 아니어야 해결된다. 

 미국의 계관시인 도널드 홀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에서 “내 난제는 죽음이 아니라 늙음이다”라고 했다. 여든 이후에 쓴 그의 에세이에서 나는 늙음이야말로 호락 호락하지 않음을 미리 경험했다. 내가 바라지 않은 엉뚱한 곳에 도착하고 싶지 않다. 늙음을 알아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 ‘바지런히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과 꽃들 의 생기로운 기운’처럼, 노년을 위해 바지런히 준비하고자 한다. 
 이쯤 와서야 깨달았다. 친구를 갖는 것이야말로 해야 할 준비라는 것을. 다른 어떤 일과 마찬가지로, 늙어가는 데에도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늙음을 맞는 것은 늙음을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거다. 노년의 모든 것을 혼자 해내겠 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친구와 함께라면 홀로 대면해야 하는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다.
 친구와 무얼 할 거냐고 묻는다면, 우정을 쌓을 거라고 대답할 거다. 늙음의 우울과 절망이 찾아들 때마다, 같이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노년은 개선된다. 마음의 울타리를 활짝 열어 제치고, 서로의 텅 빈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위 안이 된다. “괜찮아” “나도 그래” “우린 함께 늙는 거야”라는 한마디 말만으로도 위 로가 된다.  
 이대로 늙어도 좋은지 의심해봤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엄마에게 이야기가 통하는 친구와 마음속 얘기를 들어줄 친구가 있었는지 떠올려봤기 때문이다. 엄마의 외로움 을 딸이 모른 척 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봤기 때문이다. 어떻게 늙고 싶은지에 대한 목 표가 있었기 때문이고, 친구를 갖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낭독너머’는 나에게 없었던, 내가 갖고 싶은 만남이다. 책이라는 공통된 관심과 배 움과 나눔에 대한 의욕이 굳혀진 모임이다. 각자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포트 락 상차림처럼, 각자 가져온 글을 펼쳐 낭독하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시간이 다. ‘평생 함께할 친구들’을 꼬박꼬박 만날 수 있는 장치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달콤해진다. 기이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평화로 변한다. 두려 움이 줄고, 신뢰감이 생기며, 마음이 든든해진다. 늙음의 시간을 뚫고 나갈 힘과 기꺼 이 늙어갈 용기가 생긴다. 희망이 뭉글뭉글 솟아오르며, 손잡고 하고 싶은 일들이 즐 비해진다. 돕고 나누고 응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내 마음의 아늑한 사랑방 같은 친구들’이 될 거다. 
 정여울이 ‘헤세로 가는 길’에서 말했다. “‘나를 지켜주는 것들’의 목록을 떠올리면 엄청난 마음의 부자처럼 느껴진다. 조금 부족해도, 조금 엉뚱한 짓을 해도, 언제나 내 숨겨진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결코 두렵지 않다”고. 가을이 겨울로 바 뀌었지만, 몸이 떨리게 추운 날에도 봄 같은 날이 있고, 몸이 움츠러들 만큼 찬 날에도 살얼음을 녹여줄 따스한 햇살이 있지 않은가.  
 노년이야말로 인생의 본무대일지도 모른다. 삶 전체를 가늠하는 인생의 결정체일 지도 모른다. 늙어서도 사는 것 같이 살고 싶다. 노후를 저렇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잘 살아내고 싶다. 글자 그대로 잘 늙고 싶다. 도원결의를 하듯 우리는 “끝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 서로의 곁을 지키며 같이 늙어갈 거다. 우리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을 거다. 나는 법석 피우지 않고 이 기쁨을 즐기기 위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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