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버려진 운동복 입고 훈련해 세계대회에 참가하게 됐어요”

  • 입력 2022.01.03 00:00
  • 수정 2022.03.23 14:58
  • 기자명 김채은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배정연 아이스하키 선수

 

 “선생님. 저 당분간 학교에 못 나올 것 같습니다. 태릉으로 가요.”
  갑자기 등교를 못 하게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담임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은 어리둥절 했다. 세계선수권대회 참가선수로 선발됐다는 뒷이야기를 듣고는 “정말이야?”를 연발했다. 아이스하키를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세계무대에 서게 될 줄은 예상도 못 했던 것. 하정민 수성중학교 교장은 “교직생활 중에 만난 학생 중에 가장 성 격이 좋고, 영특하다”며 “목표를 가지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다른 학생들에게 귀감 이 된다”고 말했다.
  대구 수성중학교에 재학 중인 배정연(15·수성중2)양은 최근 아이스하키 유망주로 급부상 했다. 골리 포지션을 맡은 배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이스하키 스틱을 처음 잡았다. 운동 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각을 드러냈다. 각종 아이스하키 대회에서 우수한 기량을 보여주며 베스트플레이어 3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2021년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아 이스하키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된 데 이어 12월에는 2022세계선수권대회 18세 이하(U18) 여 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참가선수로 선발됐다. 선발된 선수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다.


병원에서는 가정폭력으로 오해
“몸에 멍이 많은 혹시 부모님이 너를 때리니?”  간혹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걱정스럽게 질문을 했다.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던 배양 은 그 질문을 받고 웃음을 터뜨렸다. 배양은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뒤로 부상으로부터 자유 로워질 수 없었다. 배양이 속한 대구팀은 혼성팀으로 여학생은 배양을 포함해 2명뿐이었다. 때문에 남자 선수들과 같은 강도의 훈련을 해야 했다. 한번은 경기를 하다 퍽이 얼굴을 향해 날아와 헬멧이 찌그러진 적도 있었다. 골리 포지션은 날아오는 퍽을 막는 것이 목표기 때문 에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배양에게 스포츠는 친숙한 단어였다. 유치원 때부터 골프를 배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이스하키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도 큰 고민 없 이 해보기로 했다. 
 “너는 골리가 좋겠다.”
 포지션 테스트를 해보고 감독님이 말했다. 처음 경기에 투입되면 빠르게 날아오는 퍽을 보고 겁을 내거나 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배양이 끝까지 퍽을 응시하며 잡아내는 것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막상 입문해보니 장비와 옷이 너무 비쌌다. 300만원을 웃돈다는 것을 알고 그만둘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링크장에 누군가 두고 간 아이스하키복을 입고 연습을 시작했다. 방치돼 있던 옷은 근처에만 가도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고, 군데군데 곰팡이도 피어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새 하키복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그냥 입겠다고 했다. 성장기였기 때문에 옷 을 사면 금방 작아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큰 각오를 가지고 시작한 운동은 아니어서 금방 그만두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1년을 채운 뒤에 새 하키복을 샀다.
  비주류 종목이었던 아이스하키는 어려운 점도 많았다. 특히 대구는 연습 환경이 열악했다. 무엇보다 여자 선수의 수가 많지 않아 락커룸도 없었다. 정식 경기에서는 선발되지 못해서 대기석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배양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골키퍼 포지션을 맡은 선수가 빠지게 되면서 경기에 참 가하게 됐다. 기회가 왔을 때 잘 잡아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다. 선수 중에 나이가 가장 어 렸지만 순발력과 민첩함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팀원과 감독도 점차 배양을 인정했다. 대기석에 앉아 있는 날보다 경기에 뛰는 날이 늘어났다. 열심히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자 의 욕도 커졌다. 지난해부터는 스스로를 프로라고 되뇌며 국가대표를 목표로 연습하고 있다. 학 교에 가는 시간을 빼면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에도 개의치 않고 연습을 강행했다.
 가장 힘든 부분은 정신력이다. 스포츠는 멘탈 관리가 필수. 당차고, 쾌활한 성격이지만, 힘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힘들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때도 있다.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하품하는 척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스트레스는 신천에 나가서 뛰거나 복싱으 로 해소하고 있다.  
 복싱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하루는 체육관의 관장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갑자기 관장님의 주먹이 눈앞까지 날아왔다가 멈췄다. 관장님은 배양이 복싱에 재능이 있다 고 느껴 배양을 시험을 해보기 위해 주먹을 날려본 것이다. 평소 아이스하키에 단련돼 있었 던 배양은 눈을 감지 않고 주먹을 응시했다. 
 관장님이 “힘도 세고, 담력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 복싱에 재능이 있다. 혹시 제대로 배워 서 선수를 해 볼 생각 없느냐?”고 제안했다. 배양은 “제안은 감사하지만, 나의 꿈은 아이스 하키 국가대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링크장 안에서는 자신 있게, 밖에서는 예의 있게
 서울에서 재능 있는 선수들을 많이 만났다. 대구 출신 선수는 혼자뿐이라서 팀원들과 빨 리 친해져야 했다. 서먹한 관계를 깨려고 자신만의 방법을 썼다. 바로 물건을 빌리기. 머리 방울이 끊어졌다거나 양말을 잊어버리고 안 가지고 왔다고 말하며 물건을 빌리고 그 구실 로 말을 걸어서 친해졌다. 대부분이 언니들이라서 살갑게 다가가면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언니들과 경기를 하면 즐겁고, 열정이 뿜뿜 솟는 느낌이에요. 내가 잘하면 팀에 도움이 된 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몸을 사리지 않게 돼요.” 
 한편으로 국가대표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관계라서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자 신만의 좌우명을 만들었다. ‘링크장 안에서는 나이를 잊고, 자신감 있게 경기에 응하고, 링크 장 밖으로 나오면 막내로 돌아가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자’다. 어린 나이지만 많은 선수들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얻게 된 교훈이다.
 학교에 배양의 소식이 알려진 뒤로 친구들의 응원 물결이 쇄도했다. 학급에서 반장을 맡 고 있는데다 밝고 쾌활한 성격 덕에 배양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다. 친구들은 복도에 배양 을 응원하는 엽서를 걸었다.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으로 평소에 존경하고 있던 신소정 전 국가대표 골리를 만날 수 있 게 됐어요. 신소정 코치님 때문에 아이스하키 시작했는데 마침 여자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골리 코치로 선임되어서 이번 대표팀 훈련에서 꼭 같이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의 활약 덕분에 아이스하키를 꿈꾸는 후배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