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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 없는 세계

  • 입력 2021.11.05 00:00
  • 수정 2021.11.26 10:38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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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는 곳이다. 휘황찬란하고 세련된 도시에서 우리의 감각은 사라졌다. 돈과 권력을 과시하는 고층빌딩 속에서 우리는 작아졌다. 빽빽한 아파트 숲속에서는 느슨할 수가 없고, 높은 벽 너머로는 사람의 속을 엿볼 수 없으며, 꽉 닫힌 문틈으로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본심을 전할 기회도 없고, 인간성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그럴 듯해 보이지만, 도시는 인색하다.
시골에서 가을을 맞는다. 집집마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울타리 너머로 대추가 한가득 매달려 있다. 골목길에는 빨간 고추가 널려있고, 지붕 위에는 크고 둥그런 박이 누워있다. “고~물 삽니다. 고장 난 농기구나 고~물 삽니다” “찢어진 방충망 갈아드립니다. 깨진 창문이나 샤시문 수리하세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처마 밑에서 양동이가 똑똑똑 떨어지는 빗물을 받고 있다. “빗물은 받아 뭐하게요?”하고 물으니, “밭일하고 나서 손도 씻고 걸레도 빤다”고 한다. 아직도 남아있는 것들이 기억 뒤편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살며시 마음을 건드린다.
사람들의 얼굴은 진~짜 선하고, 말씨는 정~말 순박하다. 신기하게도 만나면 죄다 뭔가를 준다. 손수 담근 부추김치와 매실잼을 내밀지를 않나, 쪽파를 밭에서 냉큼 뽑아주지를 않나, 작고 예쁜 호박을 골라 따주지를 않나. 잘 익은 홍시를 한 ‘다라이’ 씩이나 담아줄 때는 놀라서 입이 떠~억 벌어진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곳에서는 함부로 쓰레기를 버릴 수 없고, 아무도 떠들지 않는 곳에서는 마구 떠들 수 없는 것처럼, 이 ‘물욕 없는 세계’에서 나도 어쩌면 선해지고 순박해질 지도 모른다.
‘혼자’ ‘조용히’ 지내려고 시골에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좀 다르다. 도시에서 굳어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고, 평소에는 잘 알아보지 못하는 선한 마음이 눈에 보인다. 진짜 소박하게 사는 삶을 보니, 진짜 소박한 감동이 일어난다. 도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보니, 마음속에도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삶이란 ‘혼자’만 잘살아가는 게 아니라, ‘함께’여야 한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라는 책에서 장석주는 “시골에 와서 비로소 서울에 바쁘게 살 때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는데, 이는 누더기 옷을 입어보아야 가죽옷의 아름다움을 알고, 바쁘게 지낸 다음에야 비로소 한가로움의 감미로움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인가”라고 했다. 시골에 오니 도시에서 잃어버렸던 본심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이 생긴다.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마을에서는 마음이 헐거워졌다. 나는 누구든 만나면 인사를 했고, 말을 건넸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안부를 물었고, 이사 간다는 이웃을 찾아가 서운한 마음을 전했으며, 장날에는 이웃에게 줄 것까지 샀다. 텃밭에서 기른 가지와 고추를 바리바리 담고, 감을 ‘다라이’째 싣고 와서 도시인들에게 후하게 나눠줬다.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들과 동네의 가게주인들과 내 친구들에게 전하면서, 시골에서는 이렇게 살더라고 보여줬다.
시골에서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말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우리는 닫을 게 아니라 열어야 하고, 채울 게 아니라 나눠야 하며, 종종 함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무얼 할 수 있을까?’ ‘마무리로 무얼 할 거냐?’를 또 묻게 된다.
모르는 세상이 참 많다. 우리가 시골을 멀리하는 것은 시골을 잘 몰라서다. 살아보지 않아서 실제로 어떤 곳인지 잘 몰라서다. 돈과 시간을 들여 멀리 여행을 떠날 게 아니라, 시골에 가보라고 하고 싶다. 텔레비전에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볼 게 아니라, 한 번은 시골에 살아보라고 하고 싶다. 불편을 감수하고 비용을 더 지불할 가치가 있다. 조금 더 베풀고 교감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늙어서도 ‘예쁜 주름과 맑은 낯빛’을 가질지도 모른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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